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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법의 작동과 법률가의 역할

입력
2018.04.08 13:19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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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적으로, 법률은 국회가 의결하고 대통령이 공포함으로써 효력이 발생한다. 이 절차를 거쳐 법률은 형식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대부분의 법률은 이 과정을 통해 생활세계에서도 그 효력을 발휘하지만, 몇몇 법률은 그렇지 않다. 이런 경우는 노동법 영역에서 자주 일어난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근로기준법이다. 근로기준법은 1953년 제정되었음에도, 오랫동안 산업현장에서 작동하지 못한 채 장식적 법률로 머물러 있었다. 1970년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생(生)을 마감한 것은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드러낸 대표적 사건이다. 삶을 마치기 전, 전태일 열사는 근로감독관과 대통령 등에게 청계천의 열악한 작업 현실을 알리고 근로기준법을 적용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당시 정부는 외면했다. 근로기준법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야 우리나라 작업장에서 실제 적용되기 시작했다.

앞에서 본 근로기준법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몇몇 법률은 입법자의 결단, 즉 법률의 제정이 있더라도 실제 법률로서 작동하는 데는 또 다른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국민 일반의 법의식, 사회ㆍ경제적 조건 등과 같은 다양한 변수들이 작용한다. 법 집행 기관의 법률가들이 그 법률을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적극적 의지를 갖고 있는지도 그 하나다.

1987년 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지금 정식 명칭은 ‘남녀고용평등과 일ㆍ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이다)은 법 집행 기관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효력이 축소된 노동법률 중 하나이다. ‘고용에서 남녀의 평등한 기회와 대우를 보장하고 모성 보호와 여성 고용을 촉진하여 남녀고용평등을 실현’한다는 입법 목적(남녀고용평등법 제1조)이 갖는 당위성에 비해, 실제 작업 현장에서 남녀고용평등법이 발휘하는 효력은 미미하다. 2009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으로 진정ㆍ고발되는 사건 중 실제 기소되는 사건은 한 해 10건 전후에 불과하고, 고용 차별을 인정한 판결 역시 극소수라고 한다. 그리고 그 요인으로, 남녀고용평등법 집행에 직접 관여하는 법률가들이 여성 문제에 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점, 성별 분업 등 전통적 가치관에 따라 남녀차별을 합리화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다(박선영 외, ‘남녀고용평등법 시행 20년의 성과와 과제’, 2009). 이와 같은 법률가의 소극ㆍ관습적 태도와 기업 내 여성 근로자의 열악한 지위가 겹쳐 오랜 기간 동안 남녀고용평등법은 형식적으론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론 작동하지 않는 법률에 머물러 있었다.

이 점에서 지난 3월 검찰이 신입직원 공채 과정에서 합리적 이유 없이 남성 지원자의 점수를 올려주는 방식으로 성차별을 한 KB국민은행 인사담당자를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것은 이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녀고용평등법 제7조가 근로자의 채용 과정에서 남녀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이 규정은 주로 모집 공고 등에서 노골적으로 남성을 우대하는 사례에 적용되었고, 위 사건처럼 서류심사 점수 배점과 같은 채용 절차의 내밀한 부분까지 미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 집행 기관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국민은행의 인사담당자는 특별한 죄의식 없이 여성 정규직 지원자에게 차별적 기준을 적용했을 수도 있다.

이런 일이 국민은행에서만 있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검찰의 적극적 노력이 단발성으로 그쳐선 안 된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법 집행 기관 및 법률가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남녀고용평등법을 해석ㆍ적용함으로써 더 이상 여성들이 취업에서 비합리적인 차별의 희생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 법은 그 법률에 관심을 갖는 법률가가 있을 때에만 법률로서 살아남을 수 있고,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법률가의 직업적 사명이기 때문이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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