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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발견] 용문역 지붕에는 용 두 마리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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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발견] 용문역 지붕에는 용 두 마리가 산다

입력
2018.03.19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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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역사의 발견’은 도심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지하철ㆍ전철역 역사(驛舍)들을 역사(歷史)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는 코너입니다.

경기 양평군 중앙선 용문역 전경. 양원모 기자
경기 양평군 중앙선 용문역 전경. 양원모 기자

역 건물로는 정말 독특하다. 본채를 중심에 두고, 양 옆으로 곁채 여덟 개가 첩첩이 붙었다. 본채의 기와지붕 위에는 용 두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한 마리는 지평역 방향을, 다른 한 마리는 원덕역 방향을 보고 있다. 고개는 빳빳이 쳐들었다. 기계로 찍어내는 공산품처럼 비슷비슷한 여느 역사(驛舍)의 디자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경의중앙선 양평 방면 끝자락에 위치한 ‘용의 문(龍門)’, 용문역 이야기다.

용문역은 철도 동호인들 사이에서 ‘용궁’으로 통한다. 특유의 디자인 때문이다. 어르신들에게도 ‘핫 플레이스’다. 푼돈으로 경치 구경에 식도락 여행까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용문역이 지나는 중앙선은 절경으로 유명하다. 한반도의 중앙부에 핏줄처럼 뻗은 남한강을 옆에 끼고 달리기 때문에 빼어난 운치를 자랑한다. 전동차에 자전거를 실을 수 있는 주말만 되면 중앙선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라이더(Rider)들로 붐비는 이유다.

수탈을 위해 태어나다

용문역이 위치한 중앙선(청량리~경주)은 경부선(서울~부산)에 이은 우리나라 두 번째 종관철도(남북을 관통하는 철도)로, 1942년 4월 일제에 의해 전 구간(386.6㎞)이 개통됐다. 일제가 중앙선을 만든 건 중국 만주와 한반도의 지하자원 수탈을 위해서였다. 1936년 만주에 괴뢰국(만주국)을 세우고 본격적인 자원 수탈에 나서면서 중국~조선~일본을 관통하는 철도의 필요성이 일본에서 대두됐다. 용문역은 중앙선이 완전 개통되기 1년 전인 1941년 4월 여객ㆍ화물을 취급하는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용문역의 탄생 배경에는 일제 침략, 수탈이라는 오욕의 역사가 서려 있는 셈이다.

용문역은 한국전쟁(1950~53년) 기간 역 건물이 불탔고, 1957년 6월 복구 공사를 거쳐 재개장했다. 1960년대 이후엔 인근 용문산(龍門山), 신라시대 고찰 용문사(龍門寺)를 찾는 관광객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한때 모든 무궁화호가 용문역에 정차했을 정도다. 용문역과 용문산, 용문사는 뗄 수 없는 관계인데, 바로 두 곳에서 역명을 따왔기 때문이다. 용문산이 ‘용의 문(龍門)’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얻은 데는 흥미로운 설화 몇 가지가 전해져 내려온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용문산을 보고 “용이 드나드는 산”이라는 평가를 남기면서 산 이름이 용문산이 됐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산 이름에 대한 가장 낭만적인 해석은 고려 말기 문신 이색(李穡)이 저서 ‘중수기(重修記)’에 남긴 기록이다. “암자(용문사)가 산 가운데의 높은 곳을 차지해 마치 심장의 위치에 있는 것 같다… (중략)… 가까운 봉우리들이 아득히 읍하여 좌우에 둘러 있으므로, 사랑스럽고 구경할 만하다.” 사람으로 따지면 용문산의 심장 자리에 용문사가 자리잡고 있으니, ‘심장(용)의 요지(문)로 들어간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진위야 어떻든 옛 사람들의 뛰어난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용문사 전경. 남우리 인턴기자
용문사 전경. 남우리 인턴기자

‘용궁’으로 다시 태어난 간이역

1957년 세워진 구 역사를 허물고, 지금의 신 역사가 들어선 건 2009년 12월이다. 그 해 2월 구 역사를 철거한 뒤 임시 역사 형태로 운영되다가 12월 신 역사 영업이 시작됐다. 구 역사는 전형적인 간이역의 모습이었다. 시골 분교가 연상되는 청록색 지붕의 역사와 붉게 녹슨 철로는 한적한 마을 분위기와 맞아떨어졌다. 이 때문에 구 역사를 기억하는 일부 철도 동호인들은 현재의 화려한 신 역사에 반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마을 느낌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호평도 그만큼 많다.

용문역 구 역사. 위키피디아
용문역 구 역사. 위키피디아

예전에는 철도 동호회 회원들의 ‘핫 플레이스’가 용문역이었다면, 요즘은 어르신들의 ‘핫 플레이스’로 급부상했다는 게 용문역 측 설명이다. 송욱(51) 용문역 역장은 용문역을 찾는 어르신들을 ‘만 원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1만 원짜리 지폐 한 장 들고 용문역을 찾아 밥, 술, 경치 구경까지 한번에 해결하는 어르신들이 많아서다.

실제 용문역을 찾은 16일 오전 용문역 출구 앞은 근처 식당에서 나온 직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들은 어르신들을 식당까지 ‘픽업’하는 역할을 맡는다. 보통 한 끼 식사 가격은 7,000원. 여기에 소주 1병(3,000원) 값까지 얹으면 딱 1만 원이 나온다. 손님 대부분은 만 65세 이상 어르신이기에 지하철 운임료도 없다. 1만 원 한 장으로 이른바 ‘일타삼피(밥, 술, 경치)’를 할 수 있는 셈이다. 용문역에서 만난 구상철(71)씨는 “지하철로 오면 돈도 안 들고 좋아서 이곳을 찾는다”며 “용문역에는 향수가 느껴진다. 용문산의 경치를 즐기기에도 좋다”고 말했다.

임금님 수라상에 오른 산나물 맛보고 싶다면

용문역을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매월 5일, 10일 용문역 앞에서 열리는 5일장 ‘용문천년시장’ 기간에 맞춰서 가는 것도 좋다. 맛과 모양이 뛰어나 임금님 수라상에도 올랐다는 산나물을 비롯해 버섯 등 용문 지역의 특산품을 저렴한 가격에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천년시장’이라는 이름은 용문사 안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30호 은행나무에서 이름을 따왔다. 신라 56대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이 은행나무는 심어진 지 1,000년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고찰인 용문사도 놓칠 수 없다. 신라 신덕왕 시절인 913년 대경대사가 창건한 용문사는 조선 초기 300명이 넘는 승려가 모일 만큼 번성했던 사찰이다. 일제강점기엔 양평 지역 의병들의 요새 역할을 하며 항일운동 근거지가 됐다. 방송에 소개되면서 유명해진 능이버섯국밥집도 한 번쯤 들르면 좋다. 용문역에서 읍내 방면으로 5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일제강점기 곡물창고로 쓰였던 곳을 개조해 만들었다고 한다.

용문사 은행나무 전경. 남우리 인턴기자
용문사 은행나무 전경. 남우리 인턴기자

양원모 기자 ingodzone@hankookilbo.com

남우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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