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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재산 내 맘대로 나눠주겠다” “아들 딸도 수긍해야죠”

입력
2017.06.0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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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남인 나는 왜 늘 주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형은 받기만 하나”

유산 배분 놓고 가족 분쟁 빈번

#2

부모 일방적 결정은 갈등만 초래

차남ㆍ딸과도 솔직하게 대화하며

자녀의 자발적 양보 이끌어내야

유산 문제는 가장 흔한 가족 갈등의 씨앗이다. 전문가들은 쉽게 입에 올리기 어려운 '돈' 문제일 수록, 가족간 갈등 상황에서는 진솔하게 소통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조언한다.
유산 문제는 가장 흔한 가족 갈등의 씨앗이다. 전문가들은 쉽게 입에 올리기 어려운 '돈' 문제일 수록, 가족간 갈등 상황에서는 진솔하게 소통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조언한다.

1남2녀의 막내인 40대 여성 A씨는 지난해 명절 사업가인 아버지의 일방적 유산배분 선언에 깜짝 놀랐다. “회사랑 집, 고향의 땅까지 재산은 전부 아들한테 주겠다”고 한 것이다. 놀란 표정의 A씨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농담인 양 “우리 막내딸은 집 살 때 도와줬으니 오빠 것 넘보지 마라”고까지 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추슬렀지만, 가라앉은 A씨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막내딸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고, 성장과정에 차별은 없었다. 스스로 상속에 욕심을 부린 적이 없고, 유산 싸움 같은 건 막장 집안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맞벌이 하는 남편과 벌이도 나쁘지 않아 살아가는 형편도 제법 괜찮은 편이다.

“그런데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더라고요. 내 마음이 왜 이럴까 며칠을 생각해 봤어요. 돈, 있으면 좋죠.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어요. 결국은 저렇게 유산을 나누겠다는 게 부모가 자식한테 품은 사랑의 최종결산이구나 싶더라고요. 어머니, 아버지는 나를 이 정도 사랑하셨나 보다 생각하니 슬퍼졌어요.” A씨는 “재벌가 자식들이 유산 싸움 하는 걸 보면서 혀를 끌끌 찼는데, 이제는 그 심정을 전혀 이해 못한다고는 말 못하겠더라”고 했다.

막내딸을 편히 여기는 A씨의 부모님은 병원에 갈 일이 있거나 가족모임이 있을 때면 늘 A씨를 찾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A씨의 마음 속에는 이제 섭섭함과 자책, 원망과 사랑의 감정이 뒤엉키고 있다.

공평해야 사랑이다

‘자식이 부모의 재산을 노린다’는 혐의처럼 한국 사회에서 치명적인 패륜은 없다. 동시에, 강력한 전통과 문화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유산 문제는 가장 빈번한 가족 갈등이다.

“가족상담을 하다 보면 처음에는 내담자들이 다 관계갈등이라고 말해요. 하지만 상담이 진행되면 유산 분배로 인한 갈등이 누적돼 있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부모에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서운함이 쌓이고 쌓인 거죠.”

서울부부가족치료연구소장인 이남옥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이 빈발하는 갈등을 일단 “매우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서운함으로 가슴앓이 하며 내가 패륜인가 자책하기에 앞서 자기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부모에게서 사랑을 받기 위한 쟁투하며 성장한다. 그 사랑이 유형의 것이든, 무형의 것이든 인간 본연의 욕망이고 본능이다. “어려서 형제들끼리 부모의 사랑 쟁탈전을 벌일 때, 편애가 있으면 큰 상처가 되잖아요. 이게 다시 불거지는 게 유산상속 시기입니다. 금액은 큰 문제가 아니에요.”

형제 중 차남인 B씨는 어린 시절부터 형에게만 쏠리는 사랑으로 상처를 입었다. 형에게는 온갖 좋은 물건에 특별과외는 물론 대학입학 때 근사한 양복까지 해 입혔다. 반면 B씨에게는 별 신경을 안 썼다. 순하고 무던한 성격의 B씨는 ‘나도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일념으로 ‘예쁜 짓’만 하며 성장했다. 사랑 받기 위해 늘 부모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며 알아서 하는 쪽으로 심리가 발달한 것이다. 가족간 힘의 구조는 기묘하게 뒤틀렸다. 형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도 많이 받고, 동생은 열심히 하는데도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열심히 산 덕에 저는 그럴 듯하게 가족과 자산을 일군 반면 형은 실패를 거듭해 이혼 후 혼자 살아요. 이제 부모님은 ‘넌 잘 살지만 형은 계속 챙겨줘야 하는 형편’이라며 편애를 계속 하시죠.” 유산까지 형에게 상속하겠다고 하자 곪고 곪은 B씨의 상처가 마침내 터졌다. 가정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온갖 대소사를 챙기던 B씨가 손을 놓아버리니 집안이 돌아가지 않았다. “저한테 ‘너 변했다. 인간 된 도리로 그러면 안 된다’ 하시는데 죄송한 한편으로 억울했어요. 왜 나는 늘 주기만 해야 하고, 형은 받기만 하나요?”

가족간 갈등 상황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진솔하게 털어놓고 대화로 소통하는 게 반드시 필요하지만, 재산 문제는 입에 올리기 어렵다. 사실 잘 해결되는 사례도 거의 없다. 이남옥 교수는 “가족이란 게 대체로 좋은 맘으로 덮고 잘해보자 넘어가기 쉬운데, 공정성과 공평성이 관철되지 않으면 불화를 피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분배의 정의는 국가 정치에서만 아니라 가족 관계에서도 우애와 신뢰를 유지하는 기본이라는 얘기다.

사랑의 최종결산으로서의 유산

문제는 각기 공정성의 기준이 다르다는 점. ‘장자인 내가 책임과 부담이 더 크니 많이 가져야 한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동생은 공부를 더 많이 했으니 가방끈 짧은 내가 유산으로 만회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다 과거 일이고, 현재 내가 가장 못 살기 때문에 잘 사는 형제들이 양보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입장과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내가 생활비도 더 많이 쓰는데, 당연히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 맞선다. 각자의 입장에서는 모두 공정한 기준이다.

“분배 공정성은 n분의 1로 정확히 산술적 평균을 내는 거죠. 하지만 보다 중요한 건 절차의 공정성입니다. 어떤 점이 서운하고 어떤 점이 감안됐으면 좋겠다, 서로 솔직하게 얘기하고 합의하는 과정이 필요한 거죠.” 이 교수는 “한번 얘기해 결말을 지을 문제가 아니다”라며 “여러 번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마음이 편안해질 때까지 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함께 논의해 공정성 기준을 합의해 나갈 수만 있다면, 형제간 금액의 차이는 별 문제가 안 된다. 중요한 건 그 격차가 부모의 일방적 결정으로 부과되는 게 아니라 본인의 자발적 양보와 합의로 나와야 한다는 점이다. “부모가 결론만 주면 안 됩니다. ‘형은 형편이 이러하니 조금 더 주려고 하는데 네 의견은 어떠니?’ 묻고 거기에 ‘제가 양보할게요’라고 본인의 결정으로 그 결론이 나와야 하는 거예요.” 너희들을 향한 내 사랑의 마음은 똑같다, 다만 형편이 이러하니 차등을 두려 한다는 부모의 입장을 설명하고, 여기에 자식들이 흔쾌히 자발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절차와 과정을 겪지 않으면 유산 갈등으로 인한 가족 갈등과 관계단절은 남의 얘기만이 아니다.

여전한 딸ㆍ차남 차별, 서러운 자식들

이남옥 교수는 여전히 유산 갈등의 대부분이 장자 상속과 아들 쏠림 현상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한다. 특히 최근 10여 년 사이 딸과 가까이 살며 부양의 책임은 딸에게 지우면서도 유산은 아들에게 넘기는 집이 생각보다 많다고. 함께 살기는 딸이 편하지만, 집안이 일어서려면 아들이 잘 돼야 한다는 전통적 가치관이 워낙 뿌리 깊어서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산 상속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자유를 상납할 각오가 필요할 수도 있다. B씨의 경우, 부모의 과중한 기대와 사랑이 오히려 형을 속박했다는 걸 깨닫고서야 원한이 풀리기 시작했다. “부모의 간섭과 기대가 지나쳤고, 그로 인해 부부 사이도 망가졌으니 형도 큰 대가를 치렀구나 싶더군요. 받지 않음으로 인해 내가 얼마나 큰 자유를 누렸고, 나의 삶을 나 스스로 살 수 있었던가 생각해보니 치유가 됐어요.” 상속 후 일일이 카드 사용내역까지 들여다보는 부모, 주말마다 왜 안 찾아오냐고 꾸중하는 부모, 사준 집의 인테리어까지 일일이 허락받게 하는 부모 등 자유를 잃은 아들들의 사연은 상담소의 단골 사례다.

“부모의 노년이 워낙 길다 보니 이제는 자기 삶만이라도 자녀에게 신세 안 지고 끝까지 책임지는 것, 이게 가장 위대한 유산이 됐습니다. 자녀가 잘 살게 하기 위해서는 돈보다 성실, 근면, 우애 같은 정신적인 유산을 물려주려 노력해야 해요. 그것 없이는 자칫 돈 몇 백 원 때문에 자식들 사이에 분란이 생기고 우애가 끊기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1977년 도입된 유류분 제도는 피상속인이 전 재산을 기부하거나 장남에게만 증여하는 경우에 대비해 다른 상속인에게도 법이 정한 비율로 상속 재산 중 일부를 보장해 주는 제도다. 불평등한 유산상속을 완화할 수 있게 한 법적 장치다. 상속자녀와 배우자(1순위), 부모(2순위), 형제자매(3순위)까지만 보장되며, 유류분 비율은 직계비속이 2분의 1(배우자와 자녀가 1.5 대 1), 부모 등 직계존속과 형제자녀가 3분의 1이다. 앞서 열거된 상속불만들이 유류분반환청구소송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 실제 소송은 10년 새 158건에서 911건으로 10배나 늘었다. 유산 상속 전문 법무법인 현의 김용일 변호사는 “법정상속분의 절반이 유류분으로 인정되는 만큼 최소한 상속 재산의 절반 정도는 자녀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해주는 게 분쟁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느 부모도 자식들이 이런 소송전을 벌이는 걸 원치 않는다. 대화와 소통, 조정과 화해의 과정을 거쳐 모두가 납득할 만한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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