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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정의 독사만필] 기회를 포착하는 지도자의 예지(叡智)

입력
2017.05.17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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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와 더불어 유럽의 정세는 숨가쁘게 변하여 1990년 10월 3일 동서독일은 통일되었다. 독일 통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된 냉전체제의 붕괴를 상징하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나토라는 서측 동맹에 속한 서독과 바르샤바조약기구라는 동측 동맹에 속한 동독의 통일은 유럽의 국제질서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렇지만 통일의 순간까지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동서를 막론하고 대다수 나라는 독일의 통일을 바라지 않았다. 실제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때까지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었다.

독일 정부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통일을 항상 정치목표로 삼고 일관되고 끈질기게 강대국과 주변국을 상대로 외교노력을 해왔다. 독일국민도 강력한 의지로 통일을 열망하고 희생 어린 용기로 자유를 주창해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쌓아왔다. 이런 공적이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역사의 격랑 속에서 통일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었다. 독일의 통일과정에서 유럽 각국은 심각한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냉전의 긴장 아래 강대국들은 특히 안전보장 등을 둘러싸고 마지막 순간까지 힘겨운 줄다리기를 벌였다. 독일은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적절히 조정하면서 전쟁의 위기를 통일의 기회로 반전(反轉)시켰다. 통일은 독일 정부가 이룩한 외교성과임에 틀림없지만, 독일 국민이 전쟁 책임의 감수와 국제사회의 발전에 기여해온 점을 유럽 각국이 높게 평가한 덕분이기도 했다. 독일 통일은 결코 저절로 굴러들어온 호박이 아니었다.

독일 통일을 실현한 콜 수상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120년 전 최초로 독일 통일을 달성한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의 말을 두 번이나 인용했다. “신의 망토가 역사 속에서 펄럭일 때 덤벼들어 그것을 움켜잡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는 신의 망토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는 망토가 펄럭이는 역사적 순간을 알아채야만 한다. 셋째는 신에게 덤벼들어 망토를 움켜잡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데는 용기와 이성의 조합(組合)이 필요하다.” 콜은 독일 통일을 신도 귀띔하기 어려운 돌발사태였다고 보고,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낚아챈 독일 국민의 지도자로서 뿌듯한 자부심을 비스마르크에 빗대 피력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색깔이 다른 대통령이 취임해서 그런지 사회분위기가 한결 밝아진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국제환경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북한은 또 미사일을 발사했다. 한반도의 안보정세는 여전히 위험하여 일촉즉발(一觸卽發)이라는 말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잔치기분이 가시기도 전에 대통령은 당장 북한이나 열강을 상대로 국가안보를 공고히 하는 작업에 돌입해야 한다. 그리고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통일을 향한 장정에 나서야 한다. 대통령이 된 환희는 짧고 고난은 길 것이다.

세상만사는 궁즉명(窮卽明)이고 정반합(正反合)이다. 한반도에도 전쟁의 위기 속에 통일의 기회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우리가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 반전(反轉)의 드라마를 연출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기적을 절실히 바라기 때문에 콜 수상이 인용한 비스마르크의 경구(警句)는 우리 가슴을 아리게 울린다. 우리는 낭떠러지에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한반도에도 언젠가는 신의 망토가 펄럭일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호시탐탐(虎視耽耽) 그 순간을 노려야 한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용감하게 신에게 달려들어 망토자락을 움켜잡아야 한다. 국민이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대통령만이라도 신의 계시를 포착할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한반도에 도래할지 모르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민족의 통일과 번영으로 살리기 위해서는 항상 국제정세의 동향을 꿰뚫어보면서 냉철하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한반도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로부터 두터운 신뢰와 협조를 얻어야 한다. 한국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먼저 인기를 얻기 위해 국민 사이에 들끓고 있는 편협한 민족주의나 배타주의에 편승하거나 휘둘려서는 안 된다. 국제관계에서는 스스로 감정보다는 이성, 증오보다는 우호, 경쟁보다는 협력, 대결보다는 공존, 강경보다는 유연을 중시하고, 국민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계도함으로써, 자유와 민주를 구현하는 통일한국이야말로 지역과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것이라는 확신을 만방(萬邦)에 심어주어야 한다. 대통령의 예지와 용기를 기대한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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