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황영식의 세상만사] 역사는 진보한다

입력
2016.12.15 20:00
0 0

‘촛불 혁명’에 후퇴나 반작용 따를 우려

초심과 지향점 유지하면 회피 가능해

대의제 한계 극복이 장기 과제로 남아

역사는 진보한다. 그리 배웠고, 지금도 그리 믿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인간 삶의 물질적 기초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해졌다. 노동 강도 또한 크게 약해졌다. 지금도 인간다운 삶의 기초조건조차 갖추지 못해 추위와 허기에 시달리거나, ‘노예 노동’의 혹독함을 호소하는 사람은 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은 적어도 굶주림에 시달리지는 않는다. 수사(修辭)가 아닌 진짜 노예 노동을 걱정할 이유도 없다. 그것이 얼마나 큰 역사 발전인지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만리장성 건설 당시의 노예 노동이나 강제노역을 떠올리면 분명해진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구한말이나 일제 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 경제개발 이전의 일반 국민의 삶을 떠올리기만 해도 된다.

이처럼 시간의 긴 흐름 속에서는 역사가 발전해 왔지만, 짧은 흐름 속에서는 수시로 퇴보를 겪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역사에 대한 회의론과 낙관론의 차이는 결국 시간 단위를 어찌 잡느냐에 달렸다. 주가 그래프를 10ㆍ20년 단위로 볼 때와 한 달이나 한 주 단위로 볼 때의 차이와 비슷하다.

역사의 진보는 개별 분야에서도 그대로 일어났다. 교육과 주거환경, 기술과 의료, 교통과 통신 등이 모두 그렇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추를 부른 ‘촛불혁명’도 1987년의 6월 항쟁과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거리응원 등을 거쳐 온 집단적 의사표출의 발전된 형태다. 체포나 구금 등 신체적 위험이나 이력서에 빨간 줄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집단의사를 펼쳐 보여 세상을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서울광장의 소규모 집회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고, 17일에도 대규모 집회가 예정돼 있다. 국회의 소추 의결을 받아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 절차에 들어갔는데도 촛불 민심은 계속 ‘박근혜 즉각 퇴진’을 외칠 전망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촛불집회를 이끌어 온 비상국민행동 안에서 ‘헌재 포위’여부를 두고 의견이 엇갈린다고 한다. 지금까지 다양한 의견을 집단지성으로 묶어온 국민행동의 역량에 비추어 기껏해야 촛불 행렬이 헌재를 지나는 선에 그치리라 기대한다. 만에 하나 국민행동이 여론에 민감한 정치권의 행동양식을 헌재에도 똑같이 기대한다면, 그것은 집단지성이 아닌 집단착오다.

무엇보다 ‘헌재 포위’ 여부로 내부 논란에 빠지는 것은 모든 혁명과 진보에 따르게 마련인 일시적 반작용(반동)과 퇴보의 빌미가 되기 십상이다. 지금까지 촛불이 보여 준 힘의 원천은 평화주의와 헌법 준수였다. 그랬기에 과거 다른 시위나 집회에 따랐던 이견이나 반론이 없었고, 국민의 4%에 불과한 ‘200만명’의 뜻이 전체 민심을 상징적으로 대변할 수 있었다. 국민행동이 스스로 그런 기반을 허물 경우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치나 5ㆍ16 쿠데타의 명분이었던 ‘방종한 자유의 폐기’라는 구호가 다시 등장할지도 모른다. 이런 의외의 사태를 회피할 첩경은 이미 확보돼 있다. 국민행동이 ‘최순실 국정농락’에 분노하고 낙담한 민심을 ‘촛불혁명’으로 엮어 낸 초심, 국민 참여와 행동을 통해 정치의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지향점만 잘 유지하면 그만이다.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로 이제는 정치권과의 교감도 불필요해졌다. 더 이상의 교감은 정치성향에 따른 촛불민심의 분열만 재촉할 뿐이다. 정치권과 끊임없이 대화해야 할 쟁점은 따로 있다. ‘촛불혁명’이 진정한 혁명으로 불리려면, 헌법을 고치거나 그에 준하는 제도 변화를 가져와야만 한다. 그런데 개헌 주장에 정파적 이해가 얽혀 드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정치적 중립성을 잃었다. 정치지도자에게 개별적으로 정치적 이해타산 포기를 촉구해 봐야 정치 본질상 마땅한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촛불혁명으로 대의민주주의의 제도적 한계는 한결 분명해졌다. 정보통신(IT) 기술의 발달로 직접 민주주의 요소를 도입할 사회적 기초도 갖춰졌다. 대의 민주주의의 근간은 유지하되, 그때그때 민의를 직접 반영할 제도적 장치에 대한 논의는 당장 시작해도 이르지 않다.

주필 yshwang@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