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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삶이 있는 풍경] 블랙리스트라는 훈장

입력
2016.10.2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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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지인이 휴대폰 문자로 ‘축하’ 인사를 건네 왔다. 무슨 소리냐며 심드렁하게 물음표를 보내자 “잘하고 있다고 대통령께서 인정해 주셨잖아. ㅋㅋㅋ”이라는 답장이 더해졌다. 어이가 없었다. 자랑할 성과도 없고 늘 어수선한 일상에 허덕이느라 끙끙대는 처지인데 이 나라의 제일 ‘높으신’ 분이 뭘 인정하고말고 해. 무심히 웃고 지나치려는데 다시 문자음이 울렸다. “형! 블랙리스트 올랐더라! 자랑스러워!”

하던 일을 멈춘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블랙리스트라니. 듣기에도 거북한 어감에 왠지 음습한 영화에나 나올만한 꺼림칙한 용어 아닌가. 내 이름이 어떤 연유로 무슨 리스트에 올랐기에 호들갑스럽게 저러나 싶어 컴퓨터를 켜고 관련 소식을 살폈다.

사실이었다. 소위 예술인 블랙리스트로 명명된 문건이 떡하니 인터넷을 도배하고 있었다. 옮기자면, 청와대가 정부정책에 우호적이지 않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명단을 작성해 문화체육관광부로 내려보내 검열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내용의 문건이 공개되었다는 것이었다. 블랙리스트는 2015년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 서명 문화인 594명, 2014년 ‘세월호 시국선언’ 문학인 754명,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 예술인 6,517명, 2014년 서울시장 ‘박원순 후보 지지 선언’에 참여한 1,608명 등 모두 9,473명이었고 나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정부가 검열대상자를 정해놓고 버젓이 이들에 대한 제한적이고도 강제된 조치를 암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말문이 막혔다.

그날로부터 며칠 사이에 두세 번 더 지인들의 격려와 지지가 담긴 메시지들이 날아들었다. 반응은 같았다. 잘 했다는, 그리고 없으면 서운했을 거라는 농 섞인 환대였다. 누군가는 왜 자기 이름이 빠졌는지 모르겠다며 못내 억울하다고도 했다. 워낙 상식을 벗어난 일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는 나라 꼴을 볼 때 이 블랙리스트 자체가 마치 훈장이라도 되는 양 보이니 쓴웃음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서명에 참여한 모든 문화예술인은 정부 차원의 창작지원 프로그램에 신청한다 해도 선정될 여지가 거의 없다. 말 안 듣는 ‘놈(?)’들에게 떡 하나 줄 여유마저 이 정부는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인가. 물론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고 신청할 계획도 없지만 “참 가지가지 하고 있구나” 하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온다. 무엇보다 나를 비롯한 9,473명의 동의 없이 ‘자기들’ 멋대로 검열의 대상으로 삼아 눈알을 부라렸을 거로 생각하면 분노를 누를 힘마저 일부러 거두게 된다. 울고 싶은데 웃음이 나니 이게 대체 어인 일인가.

이토록 자랑스러운(?!)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해준 서명은 당연한 나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실을 덮은 채 강제로 추진하려는 정부의 세월호 시행령은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 민주주의를 표방한 이 나라의 시민으로서 부끄럼 없이 행사한 기본 권리이자 최선의 발언이 바로 서명이었다. 사안에 따라 정부정책에 반대할 수도 있지만 찬성할 일도 있을 것이고 이 또한 나의 의지 안에서 판단할 일이다.

얼마 전 다시 서명을 했다.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 특검도입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서명운동’에 이름 석 자를 꾹꾹 눌렀다. 또 뒤를 이어 다른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해도 아무런 거리낌은 없다. 양식 맨 아래에는 ‘진실은 은폐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서명을 망설이지 않는 이유다.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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