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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준마는 늙어 마구간에 있어도···

입력
2018.07.30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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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업무로 알게 된 강 사장은 5년 전만 해도 300여명의 직원들을 데리고 3개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한 건의 큰 투자가 실패했고, 그 실패한 투자를 만회하기 위해 무리하게 후속 투자를 진행했던 것이 화근이 돼 결국 회사는 부도가 나고 말았다.

어떻게든 자기 살 궁리는 해 두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강 사장은 마지막까지 채권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자신의 마지막 재산까지 전부 내놓았다. 강 사장의 이러한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빚을 다 받지 못한 채권자들은 강 사장을 형사고소까지는 하지 않았고, 강 사장은 심각한 법적 문제 없이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물적 토대가 무너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몇 백억 원의 자산가에서 빈털터리가 되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 강 사장은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역시 큰물에서 놀아 봤던 사람이라 그런지 그의 꿈은 컸다. 높은 건물을 올리려면 기초공사를 튼튼히 해야 한다며, 강 사장은 자신이 쌓아 올렸던 것은 한순간에 무너질 모래성이었다며 반성하고, 이번에는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을 강한 기초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사업 초기부터 변호사인 나와 세밀한 점검을 한 것도 그때문이다.

영화롭던 과거를 생각하면 힘이 빠질 만도 한데 그는 지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자기가 스승으로 생각하는 노스님이 적어 준 문구를 내게 보여 주었다.

‘노기복력 지재천리(老驥伏櫪 志在千里) 열사모년 장심불이 (烈士暮年 壯心不已)’

힘들어도 뜻을 잃지 말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나는 그 문구가 심상치 않아 출전을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이 문구는 우리가 ‘삼국지연의’를 통해 익히 잘 알고 있는 조조(曹操)가 지은 시에 나오는 것이다. 조조가 53세 때 치열한 전쟁 중에 지은 시가 ‘귀수수(龜雖壽: 거북이 비록 오래 산다 해도)’인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신령스런 거북이가 비단 장수한다 해도 죽는 때가 있고(神龜雖壽 猶有竟時, 신구수수 유유경시)

이무기 안개를 타며 오른다 해도 끝끝내는 흙먼지만 될 거라네(謄蛇乘霧 終爲土灰, 등사승무 종위토회)

준마는 늙어 마구간에 있다 해도 뜻은 천리를 달리고(老驥伏櫪 志在千里, 노기복력 지재천리)

열사 늙었으나 사나이 마음까지 끝난 것은 아니라네(烈士暮年 壯心不已, 열사모년 장심불이)

차고 이지러지는 시기야 하늘에만 달린 게 아니기에(盈縮之期 不但在天, 영축지기 불단재천)

기뻐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다면 가히 오랜 세월 누릴 수 있다네(養怡之福 可得永年, 양이지복 가득영년)

행복이 닿는 곳 어디런가 마음이 번지는 대로 노래하세(幸甚至哉 歌以詠志, 행심지재 가이영지)

노 스님이 강 사장에게 써 준 글귀는 ‘준마는 늙어 마구간에 있어도 뜻은 천리를 달리며, 열사는 비록 늙었어도 사나이 큰 포부는 가시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시에서는 결코 나이에 꺾이지 않겠다는 조조의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육신은 비록 늙은 준마가 됐지만 정신은 천하통일을 향해 힘차게 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늘의 뜻을 요행으로 바라지 않고, 나 자신의 뜻대로 살 거라는 웅장한 포부까지 느껴진다. 조조의 이 시는 마오쩌둥이 특히 좋아해 자주 읊었고,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했다고 한다.

한때 천하를 달렸던 준마(駿馬), 지금은 때를 만나지 못해 나이만 먹어 마구간에 의탁하고 있다. 하지만 준마는 다시 때를 만났을 때 천하를 호령하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다. 한 번의 기회가 남았으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나는 강 사장의 눈빛에서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기초를 다지며 때를 기다리지만 준비가 끝나면 거침없이 천리를 달려가리라는 준마의 강한 의지를 본다. 그의 눈빛에서 나 또한 힘을 얻는다.

조우성 변호사ㆍ기업분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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