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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단결의 자유

입력
2018.05.20 18:51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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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2개의 국제기구, 국제연맹과 국제노동기구(ILO)를 탄생시킨다. 19세기 역사의 기억과 러시아 혁명의 현실로부터 전후 지도자들은 근로자들의 불안, 동요, 혁명, 그리고 전쟁 사이에서 인과관계를 깨달았다. 따라서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은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근로자들의 이익을 배려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에는 이러한 관심을 분명하게 반영했다. 그들은 조약 서문에서 ‘평화는 오로지 사회정의 기초 위에서만 세워질 수 있다.(∙∙∙) 다수 국민들이 불공정과 역경과 궁핍에 시달리게 하는 근로조건은 세계 평화와 조화를 위협하는 불안을 싹트게 한다’고 선언했다. (Ethan B. Kapstein, 노혜숙 역, ‘부의 분배’, 2002) 즉, 그때 인류는 평화를 위해 시급히 필요한 것이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작업이라고 본 것이다.

이렇듯 최초로 설립된 근대적 국제기구가 경제단체가 아닌 ‘노사정 협의체’란 점은 노동조합에 대한 당시의 시각 변화를 드러내는 극적인 사건이었다. 그 무렵부터 서구 국가들은 근로자의 단결권을 적극 인정하고 노동조합에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 이유는 베르사유 조약 서문에 표현했듯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민주주의 체제의 존립이 위협받기 때문이었다. 서구 국가들은 이를 러시아 혁명과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체득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대립하던 냉전 시대에는 노동조합이란 존재가 자본주의 혹은 민주주의의 정당성 혹은 존속 가능성을 담보하는 유력한 근거였다.

우리 헌법도 같은 관점에서 노동조합 제도를 받아들였다. 헌법 제33조 제1항은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규정해 근로자의 노동3권을 보장하고 있다. 헌법이 이처럼 노동3권을 보장하는 취지는 시장경제 원리를 경제의 기본질서로 채택하면서도, 노사가 상반된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계급적 적대 관계로 나아가지 않고, 활동 과정에서 서로 기능을 나눠 가진 대등한 교섭 주체의 관계로 발전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때로는 대립ㆍ항쟁하고 때로는 교섭ㆍ타협의 조정 과정을 거쳐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게 함으로써, 근로자의 이익과 지위의 향상을 도모하는 복지국가 원리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헌재 1993. 3. 11, 92헌바33).

이러한 노동조합의 역할과 헌법적 지위에 비춰볼 때, 국내 1위 재벌 그룹이 ‘무노조 경영’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거나 80년 만에 그 정책을 폐기하고 노동조합을 인정했다는 언론보도가 나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기업이 시장에서 독립된 주체로 활동하고 권리를 보장받는다면, 그와 동시에 그 기업은 민주주의 체제에서 일정한 의무를 부담해야 하고, 그 의무 중 대표적인 것이 국민이 제정한 헌법과 국회가 만든 법률을 준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벌 일가의 뜻이 무엇이든 그와 상관없이 헌법상 노동3권은 그 사업장에 관철되어야 하고, 그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평등한 법의 적용을 전제한다.

우리나라가 ILO 총회가 채택한 8개의 핵심협약 중 4개만을 비준하고, ‘결사의 자유’에 관한 협약(87호, 98호) 등 4개 협약을 여전히 비준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헌법의 노동권 조항에 비춰볼 때, 노동조합을 자유롭게 결성하고 가입할 자유의 존재에 동의하는 것을 회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1919년 창립된 ILO는 내년에 창립 100돌을 맞는다. 조금 촉박하지만, 준비 작업을 서둘러 내년에는 우리도 위 핵심 협약을 비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출범 취지에 드러나듯 ILO 핵심 협약의 비준은 모든 시민의 기본적 인권의 보장책이자 사회정의 실현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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