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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관료 엘리트들의 비극

입력
2017.01.1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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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은 엮였다고 했다. 1일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특검의 뇌물 수사와 관련해 억울하다며 한 말이다. 정황이나 의혹만 갖고 죄를 만들었다는 것이지만, 드러난 증거로 보면 수긍하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온갖 의혹들이 대통령 탓이라며 세상 비난 다 씌우는 것을 두고 ‘엮였다’고 말했다면 틀린 말이라고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되돌아보면 온전히 대통령에게만 책임을 지우기 아쉬운 대목이 많은 게 사실이다. 청와대, 검찰, 문화체육관광부의 관료 누군가가 그리하면 안 된다고 제동을 걸었다면 국정이 이 지경까지 흔들리진 않았을 일이다. 관료들의 견제가 작동하지 못한 게 권력에 눌렸기 때문만 일까. 권력이 무섭다고 침묵하다가 둑이 무너지자 이상한 대통령 한 사람 때문이라는 건 아닐까.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독일의 비극에 대한 모든 비난은 총통에게 돌아갔다. 독일 엘리트 장교의 육성은 지금도 연구 대상일 만큼 최고의 효율과 능력을 자랑한다. 이들로 구성된 최강 군대의 패배는 엘리트 집합체인 최고사령부의 판단을 무시한 총통과 최 측근들 때문이라고 살아 남은 엘리트들은 증언했다. 하지만 잘못된 전쟁을 벌인 데는 자신을 나폴레옹이라고 생각한 총통의 허세와 함께, 기계적인 효율성만을 앞세워 지도자에게 충성하는 결함 있는 군부 체계가 있었다. 가장 우수한 엘리트들은 가장 어리석은 최고지휘부를 만들어냈고, 그래서 이들은 피해자였지만 공범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7차례 열린 최순실 국조특위 청문회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나쁜 남자’ 노태강의 신상 발언이었다. “그때 좀 더 용감하고 대담하게 문제를 제기했으면, 어쩌면 오늘 같은 사태가 그걸로 끝났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혼자만의 때늦은 후회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체육국장 시절 국정농단 사태를 가장 먼저 목격했으면서 침묵한 것에 대한 후회였다. 그는 2014년 4월 정유라가 승마대회에서 준우승한 것에 대한 보복 감사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박 대통령에게 나쁜 남자로 지목돼 보복 인사를 당했었다. 그의 말대로 침묵이 없었다면 이번 사태는 없었을 지 모른다. 후회스런 침묵의 이유에 대해 그는 문화부가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그런 것들이 겁이 많이 났다고 했다. 물론 이처럼 겁이 나서든 어떤 이해가 걸려 있어서든 우리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은 도덕적 비난에 그칠 뿐 죄가 되지 않는다. 탄핵과 특검 정국에서 정치인, 교수, 학자 출신들이 줄줄이 포승줄에 묶이는데도 전통 관료들이 서슬 퍼런 칼날을 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관료들은 공복이면서 권력 한 가운데서 개인의 영달을 좌우하는 정치권력과 관계를 맺고 있다. 침묵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관료출신인 정두언 전 의원이 힘과 능력에서 밀리는 관료 엘리트가 아직도 무리하게 기득권을 유지한 채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고 있어, 문제가 발생한다고 했을 정도다.

사화로 선비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목도한 남명 조식은 선비의 큰 절개는 정치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출처진퇴에 있다고 했다. 국가를 사유화하고 정치를 개인의 재산 관리 수준으로 타락시킨 조선 정부에 대한 비판이자, 그런 정부에 꾸역꾸역 참여하는 지식인(선비)들을 향한 날 선 비난이라고 배병삼 영산대 교수는 해석했다. 권력의 마성에 무릎 꿇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시대만 해도 타락한 정부를 거부하고 돌아앉은 ‘조식’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와 달리 선택의 폭이 넓어진 지금 그런 고민이나, 침묵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훨씬 덜하지 않을까. 특검의 블랙리스트 사건에 연루된 엘리트 관료들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은 고민하는 다른 관료들에게 좋은 자극이 될 것 같다. 소극적으로 지시에 따른 것이 제대로 엮였기 때문이다.

이태규 뉴스1부문장 tg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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