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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살해된 18세 소녀의 비극적 삶을 복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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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살해된 18세 소녀의 비극적 삶을 복원하다

입력
2017.08.2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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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프랑스에서 납치 살해된 18세 소녀 레티시아를 추모하기 위해 시민들이 가두 행진을 하고 있다. 역사학자 이반 자블론카는 책 ‘레티시아’에서 사건 바깥에 놓여 주목 받지 못한 레티시아의 삶을 복원한다. 20minutes 제공
2011년 프랑스에서 납치 살해된 18세 소녀 레티시아를 추모하기 위해 시민들이 가두 행진을 하고 있다. 역사학자 이반 자블론카는 책 ‘레티시아’에서 사건 바깥에 놓여 주목 받지 못한 레티시아의 삶을 복원한다. 20minutes 제공

레티시아

이반 자블론카 지음ㆍ김윤진 옮김

알마 발행ㆍ516쪽ㆍ1만7,500원

살인 사건은 보도되고 해석되는 수순을 밟는다. 피살자들은 사회적 증상으로 범벅 돼 있다. 가난, 실직, 폭력, 술, 우울증, 게임. 시신을 둘러싼 이들은 거기서 읽고 싶지 않은 것들을 읽는다. 읽고 싶은 것을 찾아 읽는 이들도 있다. 유명인을 제외한 피살자들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존재를 드러낸다. 프랑스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이반 자블론카의 표현에 따르면 “죽은 순간에야 태어”난다.

‘레티시아’는 2011년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었던 살인 사건을 다룬다. 호텔 식당에서 서빙을 하던 18세 여성 레티시아 페레는 2011년 1월 실종돼 12주 뒤 강 속에서 토막 난 시체로 발견됐다. 살인범은 토니 멜롱이라는 31세의 남성으로, 10대 때부터 감옥에 드나든 전과자였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는 용의자에 대한 보호관찰에 허술했다며 사법부를 질책했다. 판사들은 명백한 ‘정치적 제스처’라며 대규모 파업에 돌입했고, 8,000여명의 사법관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수사과정에서 레티시아의 쌍둥이 언니 제시카가 위탁가정의 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언론에 이상적인 양부로 비춰졌던 그는 위탁 아동들을 대상으로 오랫동안 성범죄를 일삼았다.

여러모로 프랑스 사회를 들끓게 한 이 사건에, 자블론카가 손을 댄 이유는 레티시아를 한 인간으로 ‘복원’하기 위해서다. 죽음으로 인해 유명해진 이 소녀에게도 삶이 있었다는 것, 그 삶이 중단되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레티시아에게 토막 난 시신이 아닌 인간의 존엄을 돌려주고자 했다.

“레티시아가 특기할 만한 사건의 희생자라는 점을 제외하면, 우리는 그녀에 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수백 개의 기사와 보고서가 그녀를 다루었지만 그것들은 단지 그녀가 실종되던 날의 밤과 재판에 대해서만 말할 따름이다. (…) 학대 받은 아이, 잊힌 꼬마, 위탁된 소녀, 소심한 청소년, 자립의 길에 선 처녀로서 레티시아 페레는 살인자의 삶 속에서 돌발적인 하나의 사건이 되기 위해 살아왔던 것도 아니고, 사르코지 시대의 연설문이 되기 위해 살았던 것도 아니다.”

저자는 2014년 4월부터 레티시아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 지난 삶의 조각들을 꿰 맞추기 시작한다. 레티시아와 제시카의 삶은 폭력으로 점철돼 있었다.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는 어머니를 구타하고 커터칼로 위협해 성폭행했다. 어머니는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쌍둥이는 보호시설로 옮겨졌다. 살인범인 멜롱의 삶 또한 암울했다. 그의 어머니는 친아버지에게 강간 당해 멜롱의 형을 낳았다. 이후 다른 남자와 결혼해 세 자녀를 낳지만, 그 아버지 역시 알코올중독에 폭력적이었다. 이혼 뒤에 만난 새아버지로부터 멜롱은 또 다시 구타 당한다.

한 꺼풀만 들춰도 쏟아져 나오는 폭력과 강간을, 저자는 신중하게 기록한다. 섣부르게 인과관계를 풀이하는 건 역사학자로서 가장 경계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단 하나의 인과는 포기하지 않는다. 살해 당일, 낯 모르는 남자를 따라간 레티시아의 행동을 사춘기 소녀의 충동이나 일탈로 보기 힘들다는 것. 그는 그 원인을 “운명, 폭력, 그리고 굴종에 프로그램된 삶”이 마주할 필연적 비극으로 해석한다.

“비명과 구타와 눈물과 변화와 무관심이 그녀의 내면에서 끔찍한 원리, 그녀 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에 둥지를 튼 진리들을 태어나게 했고, 그것들은 마침내 그녀를 이루는 본질이 되었다. (..) ‘아빠는 언제나 옳아, 그렇지 않으면 아빠가 엄마를 죽여. 남자들이 언제나 옳아,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를 죽여’.”

폭력으로 쇠약해진 인간이 스스로를 폭력에 방치하는 과정을, 저자는 역사학, 인류학, 지리학, 정치학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논픽션 장르지만 2016년 메디치상과 르몽드 문학상 등 문학작품에 수여되는 굵직한 상을 연달아 수상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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