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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선의 욜로 라이프] 애쓰는 게 정답일까? 나는 적당히 산다

입력
2017.08.1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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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녹번동 서울혁신파크에서 5월 열린 '적당포럼'. 적당해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고민하는 모임이다. 5월 주제는 적정 노동으로 만든, 내 입에 적당히 맞는 커피 찾기. 비전화공방서울 제공
서울 녹번동 서울혁신파크에서 5월 열린 '적당포럼'. 적당해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고민하는 모임이다. 5월 주제는 적정 노동으로 만든, 내 입에 적당히 맞는 커피 찾기. 비전화공방서울 제공

“지금은 아침 여덟 시입니다. (직장에서) 나올 때는 이미 어두워진 뒤일 겁니다. 태양은 오늘 당신을 위해 빛나지 않을 겁니다.” 일에 미쳐 사는 삶에서 깨어나라고 경고하는 책 ‘일하지 않을 권리’(데이비드 프레인ㆍ동녘)는 이렇게 시작한다. 1960~1970년대 이탈리아 노동 운동을 다룬 영화 ‘천국으로 가는 노동계급’의 대사를 인용한 것이다. 태양은 2017년의 우리에게도 좀처럼 빛나지 않는다. 낙오되지 않으려면, 언젠가 행복해지려면 나를 소진해야 한다고 믿는 탓이다.

죽도록 애쓰는 삶이 남기는 건 그득하지도 않은 통장 잔액과 돌연사 또는 성인병과 외로운 노후일 뿐. 그걸 알아챈 사람들이 삶의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이른바 ‘적당히 살기’. ‘대충’ 살기와는 다르다. 덜 일하고 덜 벌고 덜 쓰고 덜 휘둘리는 삶. 대신 자유와 시간을 보상 받는 삶. 선물 같은 삶.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적게 벌고 풍족하게 사는 사람들

일 중독 사회의 정시근무자로 사는 한, 일과 삶의 균형을 잡아 가며 적당히 사는 건 불가능하다. 직장을 그만 두고 인생 설계를 다시 한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오늘만 사는 보니와 클라이드도, 게으른 베짱이도 아니다. ‘적당히 살기’의 용감한 개척자들이다. 정말 행복할까, 불안하지는 않을까.

▦인천 검암동 실험공동체 우리동네사람들 조정훈(37) 대표

“‘적당히’는 지금 내 마음이 만족스럽다는 뜻이다. 적게 소비하고 많이 누리는 삶이 목표다. 공동체 거주자 30여명이 함께 살면서 ‘돈을 많이 번다 → 많이 쓴다 → 돈이 부족하다 → 스트레스 받는다 → 돈을 쓴다’의 악순환에서 빠져 나왔다. 적게 버는 만큼 삶의 여유가 생겼다. 어떻게 하면 더 밀도 있게 살 수 있나를 고민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다. 불안하고 쫓기는 마음이 함께 살면서 누그러졌다.”

▦서울 망원동 청년 공방 오늘공작소 신지예(28) 대표

“회사 다니며 개미처럼 일해도 불안했다. 개미처럼 일해서 대부호가 되는 것도 아니다. 안락한 노후를 맞기 전에 죽을 수도 있다. 생존과 사회ㆍ지역활동,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정도만 돈을 벌고 나머지 시간은 나를 위해 쓴다. 돈을 적당히 쓰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 오늘의 나를 위해 사는 게 결국 미래의 나를 위한 것이다. 행복하지 않을 때 한 박자 쉬어갈 수 있다는 게 적당히 살기의 미덕이다.”

▦지속가능한 삶 연구단체 십년후연구소 김진선(38) 연구원ㆍ작가

“10년 간의 직장생활을 접은 것을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명확히 알고 있어서다. 연구소에 매주 두 번 나가고 요가를 하며 산다. 이런 삶이 불안하게 보이겠지만, 길을 만들어 가면 된다. 질문이 길을 만든다. 적당히 살기는 무엇이든 가급적 최소한 줄이고 사는 삶이다. 취업과 생존을 고민하는 요즘 20대보다 내가 운이 좋은 건 사실이다. 20대에게 나처럼 살라고 말해주긴 어렵겠지만, 나라면 도전하겠다.”

"모여 사니 든든하다!" 인천 검암동의 실험공동체 우리동네사람들(우동사). 서로 나누고 채워 주며 살다 보니 덜 벌고 덜 써도 괜찮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우동사 제공
"모여 사니 든든하다!" 인천 검암동의 실험공동체 우리동네사람들(우동사). 서로 나누고 채워 주며 살다 보니 덜 벌고 덜 써도 괜찮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우동사 제공

헐거운 사회 안전망을 믿고 누구나 덜컥 회사를 그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매 순간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게 적당히 살기를 택한 이들의 메시지다. 삶의 태도를 돌아보는 것에서 시작하자. 삶은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수록 더 많은 보상을 주니까.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의 진단. “2015년 서울대생이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에 동문들이 충격에 빠진 적이 있다. 할 일이 있다면 돈과 지위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삶이 요즘 젊은 세대의 지향이다. 그런 물질적 지표가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것이다. 나이 든 세대도 ‘살아 보니 이렇게 살 필요 없었네’ 후회한다. 취미가 있는지, 봉사 활동 같은 가치 있는 일을 하는지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 치열하게 살아야 행복하다면 그렇게 살면 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게 성숙한 사회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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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살기를 고민하기

서울 녹번동 서울혁신파크에선 매달 ‘적당포럼’이 열린다. 전기와 화학물질 덜 쓰고 살기를 연구하는 모임 비전화공방서울이 여는 행사다. 적당해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토론한다. 5월 시작한 첫 번째 포럼의 주제는 적정 노동으로 만든, 내 입맛에 적당한 커피 찾기. 6월엔 도시와 시골 생활자가 모여 도시 살이와 시골 살이 사이의 접점 찾기를 고민했다. 7월엔 냉장고의 지배에서 벗어나 나답게 먹고 살기를 배웠다.

포럼 참석자는 80% 이상이 20, 30대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젊은 세대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재은 비전화공방서울 매니저는 “삶을 방관하거나 순간을 즐기면 그만이라는 식의 접근이 아니다”면서 “내 속도에 맞추되 이웃과 함께 사는 길을 찾고 있다”고 했다.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 어린 시절 수 없이 듣는 질문이다. “얼마나 많이 벌고 높이 올라가려느냐?”는 속뜻. 아이들의 필독서는 부모의 욕망이 투영된 위인전이요, 어른이 되면 자기계발서에서 성공의 길을 찾는다. 얼마 전까지 자기계발서는 “견뎌라” “혹사당하라” “미쳐라” “오늘을 희생하라”를 주문했다. 내가 그저 그런 사람으로 사는 건 해이한 정신 상태 때문이라는 자책으로 끝난 독서.

최근 젊은 독자들이 찾아 읽는 에세이와 자기계발서 베스트셀러 목록에선 그런 비장함이 사라졌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김수현ㆍ마음의숲) ‘힘 빼기의 기술’(김하나ㆍ시공사) ‘오늘부터 내 인생, 내가 결정합니다’(마르틴 베를레ㆍ갈매나무) ‘약간의 거리를 둔다’(소노 아야코ㆍ책읽는고양이)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이가라시 미키오ㆍ놀) 아프니까 청춘인 게 아니라, 아픈 건 정상이 아니라는 위로. 그리고 힘을 빼고 나답게 살아야 덜 아프다는 조언.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의 분석. “‘미치고 아파라’는 책을 읽고 산 세대가 행복해졌나. 아등바등 살아 봐야 치킨집 사장님이 되는 건 똑같다. 그걸 독자들이 목격한 것이다. 독자는 주로 자칭 중산층이다. 과거 중산층은 상류층에 진입하려 한번 더 엑셀을 밟았다. 요즘은 ‘중산층의 삶도 괜찮다. 가진 것을 관리하며 적당히 누리는 삶으로 족하다’고 한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시간이라고 인식한다.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가 소득을 끌어 올리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됐다.”

적당히 사는 게 뭐 그리 어렵겠어? 오산이다. 만만치 않다. 언론인 출신 김이준수씨는 적당히 일하고 적당한 이윤 내기를 내세운 공정무역 커피 협동조합 이피쿱 대표에서 얼마 전 물러났다. “‘적정 기업’을 만들겠다고 시작했는데 스스로 적당하게 살지 못하게 됐다. 5년 간 과도한 노동에 시달렸지만 이윤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이번 실험은 실패다. 물론 내 인생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정치ㆍ경제 체제가 적당히 살아도 행복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지 않는 이상, 개인 선택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멋대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일본의 명랑한 할머니 작가 사노 요코의 통찰(‘이것 좋아 저것 싫어’ㆍ마음산책)이 방향을 일러준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김도엽 인턴기자(경희대 정치외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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