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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슬프고 잔혹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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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슬프고 잔혹한 역사

입력
2018.06.10 09:2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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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학생이던 스무 살 무렵에 새벽 첫 버스를 타는 일이 자주 있었다. 다니던 학교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시험 기간 같은 때 학교도서관에 자리를 잡으려면 날이 밝지 않을 무렵 집에서 나와야 했다. 그 시각에 버스를 타도 의외로 좌석은 거의 채워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자리에 앉아 있는 승객들 대부분은 일 하러 나가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공사장이나 인력 시장에 나가는 사람, 물건을 떼러 새벽 도매 시장에 가는 사람, 그리고 이런저런 짐 보따리를 들고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 아직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던 나는 같은 버스에 탄 승객들의 행색을 훑어보면서 꼭두새벽에 일어나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반드시 부자가 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곤 했다. 그럼에도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는 적절한 보답이 오리라는 믿음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지만.

삼십여 년 전의 기억을 소환한 것은 책꽂이에 오래 방치하고 있던 책을 며칠 전 꺼내 읽었기 때문이다. ‘현대조선잔혹사’ (허환주, 후마니타스). 그 책에 실린 한 청년의 짧은 삶에 대한 기록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해병대 출신인 그는 전역 직후에 비파괴검사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입사한다. 2001년의 일이었다. 대기업의 위탁을 받아 초음파나 자력, 방사선을 이용해서 선박의 용접 부위를 검사하는 작업을 하는 회사였다. 일은 주간과 야간으로 나눠서 했는데, 방사선 투과 검사는 주로 야간에 했다. 낮에는 선박 내에서 다른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피폭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작업자들도 방사선에 오래 노출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 2주 동안 야간에 일을 하면 1주는 주간에 일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건강을 자신했던 그는 주로 야간작업을 했다. 제대로 된 안전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고, 안전 장비나 보호 장비도 부실했다. 안전 수칙에 의한 하루 최대 작업량도 지키지 않았다. 2010년에 그는 골수형성이상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도 후회됩니다. 왜 그리 회사의 이익을 위해 죽어 가는 줄도 모르고 억척스럽고 어리석게 일했는지... 생각하면 답답하기만 할 뿐입니다. 치료라도 제때 잘 받아서 다시 건강했던 옛날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가 병상에서 남긴 글이다. 1년 뒤에 서른여섯 살의 청년은 삶을 마감했다. 청년의 글은 나에게 남아 있던 한 조각 믿음을 미련 없이 버리도록 만들었다. 누구나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는 적절한 보답이 오리라는 믿음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환경, 임금을 떼먹히거나 산재 처리를 받기 힘들 수밖에 없는 구조, 즉 하청과 원청의 관계, 정규직 노조나 국가가 그것을 방조해온 방식에 대한 적나라하고 구체적인 사례들을 읽으면서, 나는 오랫동안 그 책을 기피해 온 이유를 깨달았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듯 수없이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정말로 이렇게까지 일해야 해? 입에서 시너 냄새가 나도록 맹독성인 페인트를 칠해야 하고, 밀폐된 탱크 안에서 질식해서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해? 3D 프린터니 4차 산업혁명을 거론하는 이 시점에서? 하지만 그건 내가 전혀 몰랐던 일들일까? 흉흉한 소문처럼 늘 주위를 희미하게 떠돌던 사실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몇몇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잘 산다는 것을. 또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면 소소한 기쁨을 누리면서 살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그러나 말 그대로 뼈가 부서져라 열심히 일할수록 삶이 점점 더 나빠지는 사람들이 분명히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그게 단순히 운이나 우연 때문은 아니라서 인류의 역사는 슬프고 잔혹하게 이어진다는 것을.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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