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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잘 생겼지만 이상하다

입력
2016.12.07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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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사랑, 그리고 시위로 바쁜 나를 남겨두고 동료 몇 명이 여행을 떠났다. 나는 영원한 헤어짐이기를 바랐지만, 그들은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들뜬 표정으로 바깥세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 내용은 발전된 도시의 화려함도 아니요, 광활한 대자연의 신비도 아니었으며, 쇼핑이나 맛있는 음식도 아니었다. 새삼스레 깨달았다는 한글의 훈훈함이었다. 우리와 인접한 어떤 나라에서 각종 명소를 둘러보았다는 그들은 ‘신선한 식물을 조심해’라고 써있는 잔디밭, ‘어렵워’라고 써있는 환전소, ‘구멍’이라고 쓰여 있는 관광지 입구에서만 기념사진을 남겼다.

사진을 보고 있자니 동료들이 느꼈다는 훈훈함이 내게도 넘쳐 들어왔다. 낯설게 표기된 문구 덕분인지 그 뜻보다도 글자 자체의 생김새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한글이 너무 잘 생겨서 나는 기뻤다. 옛날식 명조체로도 숨길 수 없는 조형미는 가히 천하제일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이토록 아름다운 한글의 모양새는 구태여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이었다. 정치권의 뜻깊은 협조 때문이다.

과거 정치 보도사진은 대개 정치인들이 손을 맞잡고 만세를 하거나 멱살을 맞잡고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담았지만 때로는 정갈한 분위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병풍 또는 병풍처럼 서 있는 비서들을 뒤로하고 정치인이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야흐로 21세기. 시대가 바뀌면서 몸싸움도, 병풍도, 병풍처럼 서 있던 비서들도 카메라 렌즈 바깥으로 물러났다. 그 대신에 정치 보도사진은 백보드가 놓인 풍경을 담게 됐다. 거기엔 물론 ‘새누리당’ ‘민주당’ ‘대기업 간담회’와 같이 그 뜻보다는 생김새만 아름다운 한글이 새겨져 있곤 하다.

이명박 정부는 백보드의 쓰임새를 확장했다. ‘희망찬 녹색미래’ ‘국민경제에 희망을’ 같은 슬로건이 당명이나 회의 제목을 대체했다. 많은 경우 ‘희망’이란 두 글자는 정확히 대통령의 자리 뒤에 배치됐다. 그래서 대통령을 클로즈업하면 정장을 입은 대통령의 어깨 위로 ‘희망’이라는 단어가 마치 합성한 것처럼 두둥실 떠 있는 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이런 모습은 언론을 거쳐 대량생산되며 공적 이미지가 되었다. 사진기자들은 회의나 만찬 장면을 촬영했을 뿐이지만 보도사진이 정부 홍보에 이용되는 일을 피하지 못했다.

이번 정부 또한 백보드를 선전과 홍보에 적극적으로 사용해왔다. 공적 행사장에는 어김없이 ‘과학기술 중심 창조경제’나 ‘창조경제로 도약하는 대한민국’ 등의 글귀가 쓰였고 ‘창조경제’는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두둥실 떠 있었다. 여당은 한술 더 떴다. 지난 총선 때 연출한, 김무성 의원의 머리 위로 ‘정신차리자 한순간 훅 간다’는 글귀가 화산 터지듯이 날아오르는 이미지는 그 파격성 때문인지 순식간에 인터넷 공간을 달구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다니엘 부어스틴은 이렇게 제조된 가짜 이미지가 현실을 장악하는 현상을 질타한 바 있다. 우린 거기에 쓰이는 한글을 매일 보고 있다.

백보드 선전은 실패할 때도 많다. 지난 3월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 등장한 슬로건은 ‘잠자는 국회에서 일하는 국회로’였다. 그런데 원유철 원내대표가 너무 가장자리에 앉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를 찍은 사진은 하나같이 ‘잠자는 국회’만 나왔으니 말이다. 8월의 당정청회의 때도 비슷했다. ‘섬기는 머슴, 행복한 국민’이라는 문구가 있었지만 뉘신 지 모를 참석자의 뒤통수가 ‘섬기는’을 가렸고 어정쩡하게 일어난 이정현 대표가 ‘행복한’을 가렸다. 그리하여 사진에는 ‘머슴 국민’만 남아있었다. 실패한 백보드의 사례다.

하물며 선전에는 성공하더라도 거기 쓰여 있는 내용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정치권의 백보드가 마치 외국의 한글 표지판처럼 낯설게만 느껴진다. 글자는 잘 생겼지만 뜻을 생각하면 영 이상하고 모르겠다는 말이다.

손이상 문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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