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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잠이나 자라, 90년대!

입력
2017.09.26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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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후반 유학 시절 일본인 친구와 기숙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때마침 일본에서는 히로스에 료코가 주연한 ‘버블로 고! 타임머신은 드럼식’이라는 영화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코미디 SF인데, 주인공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10년 전(1990년)의 일본으로 돌아가 버블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 노력한다는 줄거리였다.

영화가 어떻게 했으면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을 막을 수 있었을지를 진지하게 성찰하거나 대안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많은 일본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 이유는, 과거로 돌아간 료코가 흥청대는 나이트클럽에서 짧은 미니스커트에 진한 눈썹으로 춤을 추는 장면처럼 뭔가 활기차고 자신감 넘치던 예전 모습에 대한 향수 때문일 것이라는 게 일본인 친구의 진단이었다.

난 그 일본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때의 대화가 생생히 기억나는 이유는, 그 뒤로 10년쯤 지나 아마도 비슷한 종류의 ‘미련’과 ‘왜곡된 기억’이 한국 사회에서 반복되는 데서 기시감을 느낀 때문이다. 수년 전 ‘응답하라…’ TV드라마 시리즈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영화 ‘건축학개론’도 바로 그 시절 그 장소에서 대학생이었던 내 모습을 반추하고 회상하게 했다. 그리움의 향수가 밀려들면서.

회상하면, 나는 캠퍼스의 낭만을 마지막으로 누린 세대였다. 비록 입학하자마자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기대에 각종 철학과 사회사상 원서들을 무거운 서류 가방에 집어넣고 도서관에 처박혀 살다시피 했었지만, 주변의 많은 이들이 뜨겁게 싸우고, 사랑하고, 놀고, 웃고 울었다. 그들이 그랬기에, 나 또한 기분 좋게 공부하고, 생각을 다듬어 나가고, 삶의 일관성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기억은 똑바로 해야겠다. 내가 기억하는 한국의 90년대는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사회에선 ‘지존파’가 가진 자에 대한 분노가 사무친 나머지, 애먼 사람들을 납치해서 죽이고 그 인육을 먹었다. 한국병을 고쳐야 한다는 대통령의 말을 열심히 따라 하던 교사들은 학생들을 잔인하게 구타하고, 성추행을 일삼고, 촌지를 받다가 언론에서 문제가 되면 ‘극소수의 사례를 갖고 전체를 매도한다’고 볼멘 소리를 높였다. 문제를 구조적으로 사고하고 세상을 바꾸자는 대학생들은 많았지만, 선배들이 강요하는 생각의 결은 너무나 획일적이었다. 운동권 문화가 대세인 대학의 시공간 속에서 너도나도 ‘입진보’였지만, 말과 실천의 괴리는 그때부터 이미 확연했다.

좀 더 단순한 방식으로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던 그 시절, 맹목적으로 권력을 좇고, 기계적으로 시험 공부를 하며, 뻔뻔하고 거만하게 허세를 부리면서 사람을 짓밟고 무시하는 이들은 훨씬 더 많았다. 어렸던 그들 중 장차 일부가 상층부에서 단지 다른 사람들의 노동력을 계속 무한착취하며 사회적 활기와 자신감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었다. 오히려 그때부터 ‘버블’의 몰락을 예비하고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인식이 아닐까.

수천, 수만 명의 대학생 무리들이 똑같은 짝퉁 프라다 핸드백이나 이스트팩 가방을 멘 채 속물적 욕망의 하수구로 질주하던 90년대의 풍경 속에서 대체 우리는 무엇을 추억하려는 걸까? ‘촌티’에서 벗어나기 위해 천박한 습속의 외양에 요란한 금박만 입혔던 그 시절, 학교에서 일어나던 ‘이지메’ 현상은 그저 ‘일본 탓’이었고, 모두가 함께 외칠 수 있는 말은 ‘대한민국!’ 뿐이었다. 그보단 ‘헬조선’을 직시하고, 사회 구성원들이 품위 없는 가운데 ‘품위 있는 그녀’를 희구하는 오늘날의 대중문화가 더 건강해 보인다. 90년대라고? 제발 응답하지 마라. 잠이나 자라. 깨인 정신으로 해결해야 할 오늘날의 과제가 산적해 있다.

김도훈 아르스 프락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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