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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은 남자를 사랑한 과학자

입력
2016.08.06 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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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수젠 코킨

수젠 코킨은 기억 능력을 상실한 헨리 몰레이슨을 피실험자로 만나 만 46년간 연구자로, 친구로, 말년에는 사실상 가족으로서 곁을 지켰다. 수많은 학자들이 그를 연구하고 원하는 데이터를 얻어 떠나는 동안 코킨은 그의 매니저 역할도 해야 했다. 그리고, 논문의 데이터로만 남았을 그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아주고자 애썼다. MIT.edu 인터뷰 영상 화면.
수젠 코킨은 기억 능력을 상실한 헨리 몰레이슨을 피실험자로 만나 만 46년간 연구자로, 친구로, 말년에는 사실상 가족으로서 곁을 지켰다. 수많은 학자들이 그를 연구하고 원하는 데이터를 얻어 떠나는 동안 코킨은 그의 매니저 역할도 해야 했다. 그리고, 논문의 데이터로만 남았을 그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아주고자 애썼다. MIT.edu 인터뷰 영상 화면.

1953년 8월, 간질을 앓던 27세 청년이 뇌 일부 절제수술을 받은 뒤 치명적인 기억 장애를 겪게 된다. 수술 이후 겪은 어떠한 일도 뒤돌아서면 까맣게 잊어버리는 증상. 그는 남은 55년의 생을 30초의 현재로만 살다가 2008년 숨을 거뒀고, 그 사이 뇌ㆍ심리 과학계의 가장 유명한 피실험자가 됐다. 120여 명의 과학자가 그를 연구해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고, 그를 본 적 없더라도 뇌와 기억에 관한 논문을 쓰는 한 그의 사례를 비껴가기 힘들었다. 심지어 신경(뇌)과학이 심리학으로부터 독립해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게 그의 덕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헨리 몰레이슨(Henry Gustav Molaison). 그는 숨지기 전까지 ‘H.M’이라는 약자와 상상하기 힘든 가혹한 운명, 그리고 실험 데이터로만 세상에 알려졌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뇌 인지ㆍ신경과학자 수젠 코킨(Suzanne Corkin)이 몰레이슨을 처음 만난 건 1962년 캐나다 맥길대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던 때였다. 학위를 따고 64년 MIT에 자리잡은 뒤로도 그에게 몰레이슨은 주요한 피실험자였다. 그러다 차츰 친구가 돼갔다. 온종일 실험실에 마주앉아 있다가도 누가 화장실만 다녀와도 다시 자기 소개를 하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는 사이였지만, 그래서 늘 외롭고 일방적인 관계였지만, 코킨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 통증 자각조차 없던 몰레이슨의 건강을 그가 살폈고, 병이 나면 무료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고,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학자들의 연구 제안서를 일일이 검토해 욕을 얻어먹으면서까지 진짜와 가짜를 걸러냈고, 그럼으로써 그를 ‘구경거리’로 전락시키지 않으려 애썼다.

2013년 코킨은 ‘어제가 없는 남자, HM의 기억’(이민아 옮김, 알마, 원제는 ‘Permanent Present Tense’)’이란 책을 써서 몰레이슨의 삶과 매력을 세상에 전했다. 뇌과학 교양서와 에세이의 중간쯤에 놓일 저 책의 한 자리에 그는 이런 글을 썼다. “(30초의) 단기기억에만 의존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헨리가 겪은 일은 틀림없는 비극이지만, 정작 헨리 자신은 좀처럼 고통스러워 보이는 일이 없었으며 항상 헤매고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헨리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순간을 살았다.”(책 128쪽)

뇌과학자의, 긍정을 넘어 부러움마저 감지되는 저 느슨한 마음 뒤에는 어떤 게 있었을까? 그에 대한 그리움? 노년의 불안? 회한? 그는 자신의 이야기는 거의 쓰지 않았지만, 행간의 빈 자리에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그리고 이제, 기억을 잃은 남자를 사랑한 과학자인 그의 이야기를 우리가 기억해야 할 차례다. 수젠 코킨이 지난 5월 24일 간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79세.

수젠 코킨의 책 '어제가 없는 남자, H.M의 기억' 표지. 그는 몰레이슨의 이야기를 썼지만, 쓰여지지 않은 코킨의 이야기도 책의 행간에 그득하다.
수젠 코킨의 책 '어제가 없는 남자, H.M의 기억' 표지. 그는 몰레이슨의 이야기를 썼지만, 쓰여지지 않은 코킨의 이야기도 책의 행간에 그득하다.

기억을 얽힘이라 말할 수 있을까. 좋든 싫든 그 얽힘 덕에 지금 여기 내가 있고, 우리와 그들로 나뉘고 얽혀가는 것이라 말해도 될까. 그렇다면 기억의 소거는 존재의 정체성과 가능성을 함께 지우는 잔혹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저 문장을 쓸 때의 코킨은 저 질긴 얽힘으로부터 벗어나는, 죽음만큼 과격한 자유도 생각했을 듯하다. 그리고 어쩌면 그 두 극단 사이에, 기억과 존재가 온전히 등치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 학자로서, 친구로서, 코킨이 몰레이슨에게서 찾고자 했던 것이 또 어쩌면 그것이었을 것이다.

코킨은 1937년 5월 18일 코네티컷의 주도 하트퍼드에서 나고 자라 매사추세츠 스미스대학(심리학)에 진학했다. 몰레이슨의 집과 그가 수술 받은 하트퍼드병원이 한 블록 거리였다. 훗날 캐나다 몬트리얼의 실험실에서 연구자와 피실험자로 만난 둘은, 아니 코킨은 유년의 거리와 공원을 알고 추억하는 몰레이슨이 조금은 애틋했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마저 서서히 흐려지긴 했지만 몰레이슨의 수술 전 기억은 비교적 온전했고, 불가사의하게도 만년의 그는 코킨을 고교 동창이라 여기곤 했다.

1940, 50년대는 약물 치료로 호전되지 않는 정신 질환의 유망한 요법으로, 뇌조직 파괴와 절제술이 시도되곤 했다. 하트퍼드병원의 윌리엄 스코빌도 그런 ‘야심 찬’ 뇌외과 의사 중 한 명이었다. 7살 무렵(9살이란 기록도 있다) 자전거를 타고 놀다 머리를 다친 뒤 시작된 몰레이슨의 간질 증상은 나이가 들면서 잦은 대발작(전신 강직 발작)으로 악화해갔다. 그는 강한 약물치료를 받으며 어렵사리 이스트 하트퍼드고교를 졸업했고, 기술교육을 이수한 뒤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3년 가량 일했다. 독한 항간질약에 내성이 생겨 더 이상 직장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건 24살 무렵이었다. 3년 뒤 스코빌은 그의 양쪽 관자놀이에 구멍을 뚫고 내측두엽(해마구, 편도체, 내후뇌피질 등 포함) 각 4cm 가량을 잘라냈다. 수술로 그의 간질증상은 완화됐다. 하지만 기억 형성능력(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 능력)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몰레이슨도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감당해야 할 세월을 알긴 했겠지만, 두고두고 곱씹지는 않았을(못했을) 것이다.(그의 NYT 부고는 여기.)

캐나다 맥길대는 그 무렵 정신 외과학이라 불리던 분야에서 앞선 학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 대학 몬트리올신경학연구소의 창설자이자 소장인 와일더 펜필드(Wilder penfield, 1891~1976)도 자신이 집도한 두 간질 환자의 부작용(기억상실 증상)을, 영국 캠브리지대에서 유학 온 당시 대학원생 브렌다 밀너(Brenda Milner, 1918~)와 공동연구 중이었다. 밀너는 55년 4월 하트퍼드로 와서 몰레이슨을 처음 인터뷰한 학자로, 신경과학계의 고전이 된 57년 논문으로 해마와 인접부위가 장기기억 형성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처음 규명한 학자다.

정신 외과학자들에게 몰레이슨은 기적 같은 존재였다. 다른 환자들과 달리 몰레이슨은 평균 이상의 지능과 정상적인 지각능력, 추상적 사고 능력, 추리력을 지닌 채 오직 장기기억 능력만 상실한, 기억메커니즘 연구의 완벽한 표본이었다.

몰레이슨은 장기기억과 단기기억의 구분 가설을 입증해주는 산 증거였다. 장기기억에는 정보나 사실을 기억하는 서술기억과 절차나 감정을 기억하는 비서술기억(운동기억)이 있으며 그것이 한 덩어리로 생성ㆍ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서술기억에는 또 사실을 관장하는 의미기억과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일화기억이 있고, 비서술기억에는 기술이나 습관 같은 절차기억과 슬픔과 기쁨 등에 관련된 감정기억이 있다는 것도 그를 통해 파악되거나 검증될 수 있었다. 몰레이슨은 일체의 서술 기억 능력을 잃었지만 몸을 움직여 일을 해내는 데 필요한 비서술기억은 습득할 수 있었고, 아주 간단한 노동- 잔디깎기나 지역 정신장애인 일터의 물건 포장 등-을 할 수도 있었다.

코킨의 연구소와 몰레이슨이 살던 곳은 자동차로 불과 2시간 거리였다. 1966년 몰레이슨의 아버지가 숨지고 75년 어머니(81년 별세)마저 치매 요양병원에 들어간 뒤, 또 이후 그를 돌봐주던 외가 먼 친척이 80년 숨진 뒤, 외톨이가 된 몰레이슨은 인근 빅포드 요양병원에서 남은 28년의 생을 보냈다. 코킨은 그가 이리저리 옮겨 다닐 때마다 제대로 된 시중과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보살폈고, 사회보장제도를 따져 입소비용과 진료비 등을 챙겼다. 병원 기록 맨 윗줄에는 “유일하게 관여하는 친척이자 친구이며 연고자”로 늘 그의 이름이 적히곤 했다.

어머니가 곁을 떠난 뒤 어느 날, 실험실 연구원이 몰레이슨의 지갑에서 이런 쪽지를 발견한다. “아빠는 돌아가셨다. 엄마는 요양원에 계신다. 건강하시다.”(책 328쪽) “잠에서 갓 깨어난 듯한 느낌”으로 살면서도 불현듯 감지되던 상실감을 몰레이슨은 그렇게 견뎠고, 무심한 그의 표정을 코킨이 지켜봤을 것이다.

1975년 코네티컷의 자택에 살던 무렵의 헨리 몰레이슨. 그는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지만, 가끔 자신(의 기억력)과 싸우며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sciencenewsforstudents.org
1975년 코네티컷의 자택에 살던 무렵의 헨리 몰레이슨. 그는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지만, 가끔 자신(의 기억력)과 싸우며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sciencenewsforstudents.org

몰레이슨은 낯선 사람(모두가 낯설었다), 특히 여성을 대할 때 신사적이어서 늘 앞장서 문을 열고 붙잡아주곤 했다고 한다. 몰레이슨이 잃어버린 편도체는 성 욕망에도 관여하는 부분이란 게 훗날 밝혀졌지만, 코킨은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예의와 기품이 그에게 있었다고 회고했다. 유머감각도 남달랐다고 한다. 십자말풀이를 즐겨 언제나 곁에 퍼즐과 연필을 두고 지냈는데, 어느 날 코킨이 “헨리, 당신은 퍼즐 킹이에요”라고 말하자 그가 “I’m puzzling(어리둥절)”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 연구실에 열쇠를 두고 나왔다가 난처해하자 “적어도 열쇠가 어디 있는지는 아는 거네요”라고 대꾸하더란 이야기를, 그는 2013년 NPR 인터뷰에서 전했다.(2013.6.6)

기억 장애를 겪는 이가 장애를 상쇄하는 방법으로 심리학에서 ‘인지제어처리 기능’이라 부르는 게 있다. 전화번호를 잊지 않기 위해 주의가 분산되지 않도록 쉼 없이 되뇌는 게 한 예다. 어느 날 연구실 직원들이 한 동료를 놀리기 위해 몰레이슨과 작당을 했다고 한다. 곧 들어올 연구원 이름을 몰레이슨에게 미리 알려준 뒤 그가 나타나면 반갑게 “아, 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해보라는 거였다. 유쾌해진 몰레이슨은 그 이름이 쉼 없이 되뇌다 능청스레 저 대사를 읊었고, 기겁하는 존의 표정을 보며 한없이 즐거워한 적도 있었다.(474쪽) 물론 그에겐 ‘한없이’도 30초였다.

그는 영문 모르게 노발대발 화를 낼 때도 있었고, “(나는)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이다. 남한테 피해만 끼친다”며 고함을 질러대다가 다가서는 이에게 발길질(176쪽)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의 기억력)과 불화할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누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해도, 사라진 기억을 속절없이 더듬으며 “나는 지금 나와 싸우고 있어요”라고 순하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코킨은 저 시간들을 함께 보내며, 그와 함께 늙어갔다.

그리고 100여 편의 논문과 10여 권의 책을 썼다. 그가 몰레이슨을 보살핀 것은 피실험자로서의 가치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를 통해 이룬 과학적 성취 못지않게 그와 친구라는 사실을 그는 자랑스러워했다. 몰레이슨은 장기 항발작제 처방으로 생긴 골다공증 등 후유증으로 힘든 노년을 보냈고, 어떤 도움을 원하는지 기억하지 못해 고통을 키우곤 했다. 그러면서도 코킨을 만나면,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서로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 40년대 고교 시절 만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했다. 코킨은 그 오해를 더 없는 보상인 양 기꺼워했다. 실험실 동료들이 몰레이슨의 병실에 자신들의 사진을 붙여놓은 건, 실험 목적이 아니라, 가족의 온기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1992년 코킨은 몰레이슨과 그의 법정대리인이던 친척 부인의 아들을 설득, 몰레이슨 사후 뇌 기증서에 서명을 받았다. 유고시 몰레이슨의 시신을 신속히 옮겨 MRI 촬영을 하고 뇌를 적출해 보존할 절차와 방법을 정하고, 그 일을 맡아줄 최고의 의과학자 명단을 뽑아 비상연락망을 만들었다. 몰레이슨은 2008년 12월 2일 숨졌다(향년 82세). 그의 뇌가 9시간에 걸쳐 11기가 분량의 MRI 영상으로 기록되는 동안, 코킨은 옆방에서 ‘기억상실증 환자 H.M’의 진짜 이름이 담긴 부고 자료를 만들어 언론에 배포했다. 그리고 저 사후절차가 완벽하게 끝나자 두 팔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연구진에게 박수를 쳤다. 몰레이슨의 뇌는 머리카락 굵기인 70미크론 두께의 절편 2,401개로 잘려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학 뇌ㆍ인지 연구센터에 보존돼 있다.

수젠 코킨은 몰레이슨 외에도 2차대전과 한국전쟁 참전 뇌 부상병 등을 대상으로 기억과 뇌기능,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등 다양한 퇴행성 신경장애를 연구했다. 그는 남편과 이혼한 뒤 2남 1녀를 키웠고, 아이들이 출가한 뒤론 줄곧 혼자 지내며 맹렬히(fiercely) 독립적인 삶을 즐겼다고 한다. 보스턴글로브는 1년 전 간암 진단을 받은 그가 투병을 ‘모험’이라 부르곤 했다고 썼다. 딸 조슬린은 “전 엄마를 ‘마미 쓰나미’라고 부르곤 했어요.(…)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일을 했죠”라고 말했고, 아들 데이먼은 “건강이 악화해 일어설 힘조차 없으면서 죽기 전 해야 할 일의 목록을 머리맡 휴지 같은 데 써두곤 했다”고 말했다.(bostonglobe.com, 2016.6.19)

그는 몇 년 전 에콰도르 여행 중 교통사고를 당한 개를 입양해 ‘트루퍼(trooper)’라 부르며 함께 지냈다. 병석의 그에게 어느 날 아들이 ‘트루퍼(trouperㆍ배우, 멋지다는 의미) 같다’고 했더니 그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워프 어프(woof-woof)’짖으며 트루퍼의 흉내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코킨과 함께 몰레이슨의 비서술기억 실험(거울을 보며 2겹 별 문양의 사이공간을 따라 선을 긋는 유명한 실험) 등을 공동 진행했던 밀너는 코킨을 두고 “많은 이들이 신경과학을 만지작대곤 하지만, 얼마나 많이 읽고 또 얼마나 사려 깊어야 하는지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수(Sueㆍ수젠의 애칭)는 완벽하게 훈련된 학자였다”고 말했다.(NYT, 16.5.27)

코킨은 추모 금품을 MIT 소수인종 여성 과학자와 보스턴의 한 동물치료센터, 자연보호단체인 ‘Grassroots Wildlife Conservation’에 전해달라는 유언과 함께 자신의 뇌도 몰레이슨이 있는 캘리포니아대에 기증했다.(MITnews, 16.6.1)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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