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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기사들 30년 안식처 ‘스낵카’ 사라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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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기사들 30년 안식처 ‘스낵카’ 사라지나

입력
2017.08.0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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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 성지된 강남 기사식당 두 곳

개발제한 풀리며 건물 신축 움직임

밥값 저렴하고 주차공간 넓어 쪽잠

“불 안꺼지는 몇 안되는 쉼터였는데…”

3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 '영동 스낵카'에서 한 택시기사가 식사를 마친 후 주차장을 거닐고 있다.
3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 '영동 스낵카'에서 한 택시기사가 식사를 마친 후 주차장을 거닐고 있다.

택시기사 성모(61)씨는 끼니 때면 서울 강남구 역삼동으로 운전해 ‘버스’로 갈아탄다. 손에 드는 건 운전대나 교통카드가 아닌 음식쟁반과 수저. 빌딩들 사이 한 구석에 자리 잡은 낡은 버스, 그가 밥을 먹기 위해 가는 ‘스낵카’다. 성씨는 “버스는 달리지 않지만, 음식 나르는 직원과 수저 든 기사 손은 쉴새없이 움직이는 곳”이라고 웃었다.

실제 3일 찾은 버스 안에는 창 밖을 보며 홀로 앉아 식사를 즐기는 손님들로 북새통이었다. 그러나 성씨는 요즘 버스에 오를 때마다 마음이 짠하다. “이런 모습도 이제 보고, 누릴 수 없을 것 같다”는 한숨. “곧 스낵카 운영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얘기들이 나오면서부터다.

성씨가 즐겨 찾는 스낵카는 역삼동 르네상스호텔사거리 ‘스낵카 기사식당’을 비롯해 지하철 분당선 한티역 8번 출구 앞 ‘영동 스낵카’, 관악구 신림동 ‘콜럼버스 스낵카’ 세 곳이다. 이 가운데 강남에 있는 두 곳은 특히 ‘택시기사의 도심 안식처’로 첫 손에 꼽히는 명소다. 우동 국수 등 한 끼 식사가 4,000~6,000원으로 강남 한복판치고는 저렴한 데다, 자리 배치도 버스 창가에 하나씩 돼 있어 최상의 ‘혼밥’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버스 앞 너른 공터는 넉넉한 주차공간이 돼 주고, 밥을 먹지 않고 주차장에 차를 세워둔 채 쪽잠을 자더라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성씨를 비롯해 이곳을 자주 찾는 이들이 “이곳이야말로 ‘혼밥의 성지’라고 말하는 이유다.

하지만 이 중 영동 스낵카가 이르면 내년 문을 닫을 수 있다는 소식에 기사들 마음이 편치 않다. 1982년 첫 주인이던 이재영(90)씨가 93년 지금 자리로 옮겨온 뒤 명절이나 휴일에도 늦은 밤까지 영업을 멈추지 않았던 곳이라, 안타까움은 배가 되고 있다. 현 주인 박윤규(59)씨는 “서울아시안게임을 2년 앞둔 84년, 정부가 당시 한 자동차회사에 스낵카 전용 버스 13대를 위탁 제작해 보급한 것 중 하나”라며 “그 뒤로 단 한 시간도 문을 닫은 적이 없다”고 했다.

3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 '스낵카 기사식당'에서 시민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김형준 기자
3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 '스낵카 기사식당'에서 시민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김형준 기자

손님들의 안타까운 마음만큼 주인 박씨의 고민도 깊다. 영업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 자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자리가 지난해 말 개발제한구역에서 해제되면서 상업용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됐는데, 토지 소유주들이 신축 건물을 짓기로 하면서 사실상 버스의 보금자리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다른 곳으로 버스를 옮길 수도 있겠지만 임대료 등을 생각하면 다른 곳에 가서 지금처럼 싼 값에 밥을 파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박씨는 말한다.

식당 문을 닫은 후 스낵카를 어찌 처리할지도 걱정이다. 앞서 서울시는 2015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박씨 스낵카를 지정했는데, 박씨는 시가 맡아 줬으면 하는 게 솔직한 속내다. 시 관계자는 “미래유산으로 지정됐지만 주인이 버스를 어떻게 할지 우리가 강제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라면서 “미래유산 보존 대책을 차차 논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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