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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역사란 더 나은 사회를 향한 행진”... 분단 시대 선구적 탐구

입력
2018.07.23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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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단 시대를 첫 담론화 

 1978년 용어 사용… 당시엔 충격 

 “현실 직시해 철저히 객관화하고 

 극복 위한 사론 수립해야”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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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 평화통일론’ 제시 

 분단과정, 국토→국가→민족順 

 통일과정은 분단과는 순서 달라 

 민족→국토→국가로 통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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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ㆍ미래의 역사학자 

 “세상에 믿을 것이 없다 해도 

 역사가 변한다는 사실은 진리 

 모든 인간의 이상 현실화해야”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현대사’란 말 자체가 금기시되던 시절 현대사 연구자를 자임하며 분단, 통일 등 대한민국이 당면한 이슈에 적극 발언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얻은, 절대 변할 것 같지 않은 것들도 기어코 변하고야 말더라는 깨우침 때문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현대사’란 말 자체가 금기시되던 시절 현대사 연구자를 자임하며 분단, 통일 등 대한민국이 당면한 이슈에 적극 발언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얻은, 절대 변할 것 같지 않은 것들도 기어코 변하고야 말더라는 깨우침 때문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모든 지식인들에겐 지식인으로서의 생명이 있는 듯하다. 어떤 이들은 오래 기억되고, 어떤 이들은 한때 큰 관심을 받더라도 이내 잊힌다. 역사가 변하는 것만큼 지식인에 대한 평가 또한 변화하기 마련이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생명력이 긴 지식인들이 존재한다. 원효와 지눌, 이황과 이이, 박지원과 정약용이 그런 지식인들이었다. 주목할 것은 이들 지식인의 사상에 놓인 공통점이다. 그것은 시대에 맞서서 자신의 사유와 담론을 펼침으로써 새로운 사상적 흐름의 선각자가 됐다는 점이다.

우리 현대 지성사에서 시대에 맞선 대표적 지식인으로 나는 역사학자 강만길을 꼽고 싶다. 그 까닭은 강만길이 분단 시대를 담론화한 역사학자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광복 이후 우리 현대사를 이뤄온 것은 정부 수립, 산업화, 민주화였다. 이러한 과정을 포괄하는 상위의 개념으로 분단 시대가 존재한다. 언젠가 통일이 이뤄진다면 1945년부터 그 때까지의 우리 역사는 분단 시대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강만길은 최초로 분단 시대를 개념화하고 이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주목했다. 나아가 그는 분단을 극복할 통일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통일에 이르는 길을 모색했던 선구적인 역사학자로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분단 시대의 선구적 탐구 

강만길은 1933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고려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했고 같은 대학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다 정년퇴임했다. 그는 광복 이후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실천적 역사학자였다.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1973)이 한국 자본주의의 맹아를 다룬 국사학의 고전이라면, 초판만 27쇄를 기록한 ‘20세기 우리 역사’(1999)는 시민적 계몽을 위한 모범적인 역사서다.

1970년대 이후 강만길은 자신의 탐구 시기를 조선 후기에서 20세기로 이동시켰다. 1972년에 발표된 7ㆍ4 남북공동성명이 그의 표현을 빌리면 10월유신을 위한 ‘멍석 깔기’임을 깨달았을 때, 그는 ‘개성 상인의 이야기’를 넘어서 광복 이후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강만길의 저작들 가운데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1978년에 발표한 ‘분단 시대의 역사인식’이다. 이 책은 우리 인문ㆍ사회과학의 이정표적 저작이다. 요즘에는 분단 시대라는 말이 널리 쓰이지만, 1970년대 그가 분단 시대를 처음 이야기했을 때만 해도 이 용어는 충격적이고 신선했다. 광복 이후 우리 사회는 분단 시대를 맞았는데, 이것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야만 통일을 지향할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강만길이 주목하려 했던 것은 역사학의 현재성이다. 그는 말한다.

“오늘날의 국사학이 제 구실을 다하기 위해서는 이제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사론을 세워나가야 하며 거기에서 국사학의 현재성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 분단체제는 분명히 민족사 위의 부정적인 체제이며 극복되어야 할 체제이다.”

강만길 사론집 '분단 시대의 역사인식'
강만길 사론집 '분단 시대의 역사인식'

강만길에 따르면, 역사학이 분단 시대의 극복에 이바지하는 길에는 세 가지가 존재한다. 첫째, 분단 시대를 외면할 게 아니라 현실로 직시하고 대결해야 한다. 둘째, 분단 시대를 철저히 객관화하고 비판해야 한다. 셋째, 분단 시대 극복을 위한 사론을 수립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분단 시대의 역사인식’은 분단 시대 사학의 반성, 역사와 현실, 역사와 민중에 관한 다양한 연구들을 포괄하고 있다.

분단 시대에 대한 강만길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1980년대 이후 진보적 인문ㆍ사회과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회학자 조희연의 ‘반공규율사회론’, 백낙청과 손호철이 주도한 ‘분단체제 논쟁’은 강만길의 분단 시대론으로부터 작지 않은 지적 자극을 받았다. 오늘날 누구나 흔히 쓰는 분단체제라는 말도 강만길이 분단 시대를 선구적으로 이론화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와 미래의 역사학 

강만길의 지적 관심은 분단 시대의 탐구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한편에서 그는 ‘한국민족운동사’,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 ‘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 등의 연구서를 출간했고, 다른 한편에선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 ‘고쳐 쓴 한국근대사’, ‘고쳐 쓴 한국현대사’, ‘20세기 우리 역사’ 등의 교양서를 내놓았다.

강만길은 20세기 우리 현대사를 독립과 통일의 관점에서 파악한다. 그는 일제 강점기 민족독립운동사에서 좌ㆍ우익 통일전선운동이 주류였고, 이는 해방공간에서 통일 민족국가 건설운동으로 연결됐으며, 4ㆍ19혁명 이후에는 평화통일운동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한다. 이 연장선상에서 그는 ‘흡수통일이 아닌 남북 대등통일과 타협통일’이라는 평화통일론을 제시한다. 자신의 역사공부를 결산한 책 ‘내 인생의 역사공부’에서 강만길은 말한다.

“분단과정을 ‘국토분단’과 ‘국가분단’과 ‘민족분단’의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했지만, 통일과정은 분단과정과는 그 순서가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통일과정은 분단과정과는 달리 먼저 ‘민족통일’을 시작하고, 그럼으로써 ‘국토통일’을 이루어가고, 맨 나중에 ‘국가통일’을 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만길의 통일론은 우리의 역사ㆍ사회적 특수성을 중시하는 탁견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그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장, 민족화해협력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의장,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아 통일의 초석을 놓는 실천적 활동을 벌였다.

강민길(오른쪽) 당시 상지대 총장이 2004년 평양에서 허종호 북한역사학회장과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결성 합의서를 교환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강민길(오른쪽) 당시 상지대 총장이 2004년 평양에서 허종호 북한역사학회장과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결성 합의서를 교환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어떤 이들은 역사학이 강조하는 학문적 엄격성을 주목해 시민적 계몽과 실천적 활동에 대한 강만길의 개입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이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역사 안에 갇혀 있던 지식인이 아니라 역사 밖으로 걸어 나와 그 역사와 대결했던 용기 있는 지식인이었다.

강만길은 우리 역사학자들로선 이례적으로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을 발표했다. 이 책에서 그는 전문적 학자와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삶의 역사와 우리 사회의 역사를 돌아본다. ‘역사가의 시간’은 내게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의 유고작 ‘역사를 위한 변명’과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 그리고 영국 태생의 미국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유고작 ‘기억의 집’을 떠올리게 했다.

강만길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
강만길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

아날학파의 블로크, 마르크시스트 역사학의 홉스봄, 비판적 역사학의 주트처럼, 강만길은 자기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탐구한 현재의 역사학자이자 그 시대의 실천적 극복을 모색한 미래의 역사학자다. 역사학이 과거 탐구를 통해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학문이라면, 우리 지성사에서 현재와 미래의 역사학은 강만길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역사학의 미래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말한 이는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H. 카다. 강만길은 역사를 ‘이상의 현실화 과정’으로 파악한다. ‘역사가의 시간’에서 강만길은 말한다.

“인간의 역사란 것이 모든 인간의 이상을 기어이 현실화해 가는 과정임을 기득권자를 포함한 더 많은 인간들이 터득하게 될 때, 비로소 인간의 이상을 현실화해 가는 방법과 과정이 한층 더 평화롭고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래서 역사라는 것이 가르쳐지고 또 배우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강만길이 말하는 이상의 다른 표현은 시대정신이다. 이 시대정신의 핵심은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평등을 추구하는 데 있을 것이다. 역사가 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전진하고 때로는 퇴보한다. 그러나 길게 보면 역사란 더 나은 사회를 향한 행진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 해도, 역사가 변한다는 사실만은 믿어도 좋다는 진리를 터득했다”고 강만길은 강조한다.

역사를 이렇게 파악한다면, 역사학의 과제는 그 이상의 현실화 과정에 대한 정직한 기록과 균형적 평가다. 여기서 ‘균형적’이란 기계적인 균형이 아니라 역사를 이루는 다양한 시간들을 고려하고 아우르는 것을 뜻한다. 역사는 하나의 시간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다층적인 시간들로 구성된다.

돌아보면 우리 현대사는 한국사의 시간인 동시에 자본주의의 시간, 민주주의의 시간, 분단과 통일의 시간으로 이뤄져 있다. 우리 사회의 미래는 바로 이 자본주의, 민주주의, 분단에서 통일로 가는 시간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펼쳐질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 한국 민주주의, 분단과 통일에 대한 역사학적 탐구는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한 지혜로운 전망의 출발점을 제공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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