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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길가의 풀

입력
2018.03.08 14:37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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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란 말이 있다. 당장의 일에 집중하지 않고 한눈을 파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체육 시간이 기억난다. 운동장에서 부동자세로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조금의 움직임만 있어도 단번에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자세를 풀고 고개를 운동장 밖으로 돌리고 말았다. 반항도 아니었고, 그냥 그러고 싶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신병 훈련소에서도 두 번이나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상당한 벌점까지 받아 훈련소를 제때 나갈 수 있을지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일들이 꽤 상처가 되었는지 내게는 해찰이란 말의 부정적 뉘앙스가 꽤 크게 남아 있다.

그런데 해찰은 가던 길을 두고 샛길로 빠지는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질문했을 법하다. 샛길로 가면 왜 안 되는지. 사실 실제 세상사도 얼마간 그러하지만 문학이나 예술의 역사는 정해진 길에서 해찰을 부리다 샛길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한 많은 예로 빼곡하다. 18세기 영국 요크셔에서 목사로 재직하고 있던 로렌스 스턴도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가 뒤늦게 발견한 자신의 글쓰기 재능을 허구적 서사물에 투여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는 일직선으로 진행되는 선형적(線形的) 이야기에 담기엔 인간의 삶이 너무 얽혀 있고 모순투성이라는 것을 간파했고, 유한한 인간사에서 흔히 사소하고 주변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것들의 의미를 새롭게 감지했던 게 분명하다. 그가 7년여에 걸쳐 쓴 장편소설 ‘젠틀맨 트리스트럼 샌디의 삶과 견해’(1767)가 끊임없이 이야기의 샛길에서 샛길로 빠지는 방식으로 해찰을 부리면서 독자가 기대하는 이야기의 중심적 흐름을 배반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부모의 잠자리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되는 주인공의 자서전적 고백은 계속 가지에 가지를 쳐가고 소설의 끝에 이르러도 주인공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인 이 이야기에서 ‘삶과 견해’는 그 해찰의 순간순간에 담긴다. 이렇게 해서 나중에 ‘모더니즘’이라고 불리게 될 현대소설의 문법은 20세기가 오기 한참 전에 이미 거의 완벽한 형태로 세상에 출현한다.

나쓰메 소세키가 세상을 뜨기 1년 전에 쓴 자전적 소설의 제목이 ‘한눈팔기’(조영석 옮김, 문학동네)이다. 원제가 ‘도초(道草)’인데 ‘길가의 풀’과 ‘한눈팔다, 해찰하다’의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건강 악화로 다가온 죽음을 예감하고 있던 작가에게 ‘한눈팔기’ 혹은 ‘해찰’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소설은 문부성 국비장학생으로 영국 유학을 다녀와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강사로 있던 시기의 작가 자신을 돌아본다. 그가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서기 직전인 셈이다. 외부의 기대나 시선과는 달리 그는 앞이 안 보이는 무력감에 시달린다. 아내와의 불화는 해결의 길이 안 보이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크다. 어릴 적 양부와 양모의 출현은 잊고 있던 어두운 과거의 사슬로 그를 옥죄어 온다. 그가 서양에서 힘겹게 공부한 시간은 뒤틀린 자기애만 부추길 뿐 당장의 그를 둘러싼 현실에 무력하다. 아내의 출산 때 탈지면을 핏덩이 아이 위에 덮으며 바보처럼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은 연민을 자아낼 정도다. 기실 무지한 누이나 형, 양부와 양모, 그리고 아내와 그의 사이에 그가 애지중지했던 지(知)나 사상의 위계 따위는 없었거나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인간이나 인간의 행복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오히려 소설의 끝에 이르러 삶을 지탱하는 지혜의 자리로 부각되는 존재는 그가 그토록 무시하던 아내다. 아마도 이 어름에 일본인의 정신적 스승으로 떠받들리던 만년의 작가에게 찾아온 ‘한눈팔기’ 혹은 ‘해찰’의 의미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길가의 풀이 세상의 전부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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