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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선 끼니마다 형이 먹을 밥을 상에 올리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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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선 끼니마다 형이 먹을 밥을 상에 올리셨어요…”

입력
2018.08.20 18:10
수정
2018.08.20 20:24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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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포로∙납북자도 상봉 성사

北에 생사 의뢰해 6가족 참여

제21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 1회차 첫날인 20일 남측 이산가족상봉단을 태운 버스가 강원 고성군 동해선 남북출입사무소(CIQ)를 통해 금강산으로 향하고 있다. 고성=연합뉴스
제21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 1회차 첫날인 20일 남측 이산가족상봉단을 태운 버스가 강원 고성군 동해선 남북출입사무소(CIQ)를 통해 금강산으로 향하고 있다. 고성=연합뉴스

20일 금강산에서 재북(在北) 가족과 상봉한 남측 이산가족에는 6ㆍ25 전쟁 때 북으로 잡혀간 국군포로와 전시납북자 가족들도 포함됐다. 이미 당사자들이 모두 별세했지만, 그들의 자손을 통해서라도 혈육의 흔적을 찾고 핏줄을 이어보려는 애틋한 인지상정의 발로였다.

“어머니는 끼니마다 꼭 형이 먹을 밥을 떠 상에 올리고 ‘밥공기에 물이 맺히면 네 형은 살아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방북 전 회고한 최기호(83)씨는 의용군으로 납북됐다가 2002년 숨진 세 살 위 큰형 영호씨의 딸들을 만났다. 그는 “뜨거운 밥에 물방울이 맺히는 것처럼 어머니는 형도 당연히 살아 있으리라 생각하셨던 모양”이라며 “조카라도 상봉이 돼 감개가 무량하다”고 했다.

이재일(85)씨는 형 재억씨가 1950년 6~7월 18세 때 납북된 것으로 기억한다. 이씨 부친은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고 고생만 시켰다”며 아들을 간절히 기다리다 4년 만에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1997년 숨진 형 대신 조카들이라도 만나려고 행사에 참여했다.

인민군 관계자 회의에 갔다 돌아오지 않은 형(당시 21세ㆍ1981년 사망)과의 해후를 바라던 곽호환(85)씨도 조카들과의 만남으로 그리움을 달랬다. 곽씨 아들은 “큰아버지 자녀들이라도 아버지가 만나게 돼 다행”이라고 했다.

평북 용천이 고향인 이영부(76)씨는 전쟁 때 함께 남으로 내려온 부친이 서울 혜화동에서 동네 통장으로 일하던 1950년 9월 납북돼 다시 북으로 돌아갔다고 기억한다. 장남인 줄 알았던 그는 1962년 모친이 생활고로 30대 후반에 요절하고 나서야 북에 형이 둘 있다는 사실을 고모에게서 들었다. 그는 이날 작고한 형들의 자식과 마주 앉았다.

홍정순(95)씨는 형제와 남편을 북에 두고 남에 살았다. 홍씨에 따르면 공무원이던 남편은 6ㆍ25 발발 직후 북에 끌려갔다. 홍씨는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 남편 대신 조카들을 만났다.

부친이 국군포로인 이달영(82)씨는 1987년 별세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친 대신 이복동생들과 상봉했다. 남측은 이번 행사를 준비하며 국군포로ㆍ납북자 50명을 뽑아 북측에 생사 확인을 의뢰했고 이 중 21명의 생사가 확인돼 국군포로 한 가족, 납북자 다섯 가족 등 6가족이 행사에 참여했다. 앞서 상봉한 국군포로ㆍ납북자 가족은 54가족이다. 북한은 납북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금강산=공동취재단ㆍ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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