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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길 위의 이야기] 크레파스

입력
2017.02.1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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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파란색 대문집에 살던 때니까 나는 여섯 살이 넘지 않았을 것이다. 다섯 식구가 안방에 이불을 깔고 오종종 모여 자던 시절이었다. 나는 잠든 가족들을 다시 한 번 살피고는 가만가만 방을 빠져 나왔다. 언니의 책상 맨 마지막 서랍 안에 곱게 누운 왕자파스 56색도 살그머니 꺼냈다. 스케치북도 겨드랑이에 끼고 내가 향한 목적지는 화장실이었다.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다 스케치북을 펼치고 왕자파스를 열었다. 쉰여섯 가지 색깔이라니. 노랑도 그냥 노랑이 아니라 개나리색, 레몬색, 미색으로 나누어졌고 분홍도 그냥 분홍이 아니라 홍매색, 진분홍색, 연분홍색으로 나누어진 그야말로 찬란한 크레파스였다. 내가 크레파스를 들고 한밤중에 화장실로 간 건 모조리 언니 때문이었다. 세 살 터울 언니는 내가 제 크레파스에 손을 댈까 전전긍긍이었다. 하루 종일 눈을 반짝이며 크레파스를 지켰고 학교에 갈 때는 가방에 넣어 갔다. 물론 나는 그날 들켰다. 하필 잠에서 깬 언니가 화장실 문을 열어젖혔고, 언니의 꺅꺅 비명소리에 깨어난 엄마까지 합세해 나를 쥐어박았으니 참 서러운 밤이었다. 내가 가진 건 고작 티티파스 여덟 색이었단 말이다. 그것도 노랑과 흰색은 다 닳아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왕자파스에 대한 부러움은 여태도 생생해 나는 16개월 아기에게 자그마치 64색 크레용을 사주었다. 나는 아기 앞에서 크레용을 다 꺼내놓고 예쁜 빛깔들을 골라준다. 아기는 관심도 없다. 그림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언니는 그 왕자파스를 다 쓰긴 했을까. 기어코 나에게 물려주진 않았는데. 서랍 속 노트들을 들추면 그 속에서 빼꼼 풍기던 크레파스의 들큼한 기름 냄새가 아직도 생생한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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