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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진 칼럼/1월 11일] 관용(寬容) 없는 한국사회

입력
2014.01.10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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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2년 6월 세종은 평안도 절제사(군사담당 부지사)에게 교서를 내렸다. "무릇 장수는 관용(寬容)과 엄격(嚴格)을 아우르고, 은덕(恩德)과 위력(威力)을 같이 해야만 효과를 거둘 수 있는데, 경의 위력은 너무 많은 것 같고 은덕은 너무 적은 것 같다. 아침에 명령하고 저녁에 독촉하니 폐해가 크다. 엄격함과 너그러움을 적절히 사용해 점진적으로 성취하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절제사가 병영의 법과 원칙을 모두에게 엄히 적용하는 바람에 북쪽으로 도망가는 백성이 많다는 보고를 받고서다.

당시 관용의 의미는 강자 혹은 가진 자가 약자 혹은 없는 자에 대해 베푸는 은덕이나 용서, 너그럽게 대함 등의 의미였다. 수직적 관계에서의 관용으로 장수의 도리, 군자의 덕목 등 도덕적 차원의 문제였다. 수평적 관계에서 관용의 의미는 베풂과 시혜의 문제와는 다르다.

공존의 의미로 관용이 본격 거론된 것은 16~17세기 유럽에서였다.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수용하면서 관용령(令)을 내놓았으나 이후 이단과 이교도를 탄압하기 위해 비(非)관용 조치들을 쏟아냈다. 중세시대엔 관용이란 말 자체가 사라졌다.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정교(政敎)분리라는 소극적 관용론이 있었고, 이어 종교와 사상의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공존의 관용론이 대두됐다. '자신과 다른 타인, 우리와 다른 저들'을 인정하여 존중하기 위해서는 인내와 절제가 필수적이었고, '톨레랑스' 즉 관용이 사회적 합의로 뿌리 내렸다. 유엔이 창설 50주년 대전환점이었던 1995년을 '관용의 해'로 선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톨레랑스' 의미의 관용은 오히려 오래 전부터 태생적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듯하다. 유일신을 함께 믿으면서도 수단과 방법을 놓고 치열한 전쟁을 벌였던 유럽과는 달리 '진리는 하나지만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다'는 불교적 영향이 깊었던 까닭도 있었다. 자신과 우리에게 직접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굳이 타인과 저들을 박멸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무관심으로 변질될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중요한 생존법칙 중 하나였다. 별도로 수직적 갈등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도리나 덕목이 강조되었고, 앞서처럼 세종이 절제사에게 (아마 절제사는 또 그의 부하장수에게) 관용을 가르치는 정도가 익숙한 모습이었다.

관용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 동기는 우리 사회의 관용 수준이 지구촌에서 웬만큼 먹고 사는 나라 가운데 꼴찌라는 보도였다. 한국경제학회 최근 논문에 따르면 한국사회의 관용도가 OECD 31개 회원국 가운데 31위로 나타났다. 지속 가능한 국가발전의 세 축이 성장동력, 사회통합, 환경 3가지인데 그 중 사회통합의 축이 특히 취약했고, 관용사회 항목에서 최하위로 나타났다. 판단의 근거로 장애인 배려(관련 법률 수), 관용성, 외국인 수용 3가지를 제시했다. 관용성에 대한 객관적 계량비교는 세계적 권위기관의 정기적 설문조사를 토대로 했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관용의 일반적 의미는 타인이나 저들에게 자유로운 생각과 신념이 있음을 인정하고, 외적인 힘을 이용하여 자신이나 우리의 생각과 신념을 강제하지 않는 것이다. 도덕적인 은덕 시혜 용서라기보다 사회적으로 '톨레랑스'의 의미다. 현재 한국사회의 관용도는 OECD 회원국 차원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최하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존보다 박멸을 추구하는 듯한 정치권의 싸움, 갈수록 심화하는 갑을(甲乙) 대립과 빈부 양극화, 끼리끼리만 모여 외부의 존재를 부인하는 말과 행동 등은 이를 뒷받침하는 충분한 정황들이다.

새롭게 '톨레랑스 재무장 운동'이라도 벌여야 한다. 그것은 강자의 전유물이 아니며 승자의 전리품은 더욱 아니다. 약자이거나 패자에게도 똑같이 관용의 여지가 있다. 수평적 상호 인정과 공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관용을 사회적 합의로 정착했을 당시 '자신이 올바르지 않다고 여기는 신념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 올바르다'는 말이 유행했다. 언제나 누구나 새겨야 할 말이다.

정병진 주필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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