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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농담과 농단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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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농담과 농단 사이

입력
2016.10.2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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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청와대에서 '연설문 유출 의혹'에 대해 대 국민 사과를 한 후 인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청와대에서 '연설문 유출 의혹'에 대해 대 국민 사과를 한 후 인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최순실 씨가 (권력) 1위이고, 정윤회 씨가 2위이며, 박근혜 대통령은 3위에 불과하다.” 박관천 전 경정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했던 이 발언은 그때만 해도 너무 황당해 농담이라고 해도 별 농담을 다 한다며 힐난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무도 이걸 단순한 농담으로 듣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정치적 식견을 갖춘 전문가도 아닌 사인을 정무에 동원했다. 무슨 능력이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인물이 대통령을 좌지우지하는 비선 실세였다.

거창한 음모론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은 흔히 거악(巨惡)이 사악하고도 치밀한 계획으로 국정을 농단하며 국가에 치명적인 위해를 끼치는 그림을 상상하고는 한다. 하지만 이번 스캔들에서 우리가 본 것은 너무나 평범하고 터무니없는 부도덕과 부조리였다. 다만 그 배경이 청와대였을 뿐이다. “간절하게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 “혼이 비정상” “그런 기운이 온다” 같은 말로 유명한 박 대통령의 눌변이 소위 비선 실세가 손을 댄 결과물일 수 있다는 이야기, 오ㆍ탈자는 물론 욕설까지 쓰여 있는 리포트가 정상적인 학점을 받은 배경에 알고 보니 대통령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사실 거악을 상상하는 것보다도 초현실적이다.

이 이야기는 너무 허황한 나머지 비판할 수준을 까마득히 넘어서 버렸다. 대신 선택한 건 조롱이다. SNS의 타임라인은 바지사장이니 로봇이니, 아바타니 하는 대통령에 대한 조롱으로 가득 찼다. 언론사의 SNS 계정이 최순실이 박 대통령을 마리오네트처럼 조종하는 합성 사진을 올릴 정도다. 쉬이 정치 이야기를 꺼내지 않던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서도 다들 이 스캔들을 놀리느라 신이 났다.

그것은 분명히 국정을 농담거리로 전락시킨 대통령의 책임이다. 국정을 총괄해야 할 공인의 의무를 내던지고 지극히 사적인 친분에 기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는 비판을 거둘 수 없다. 하지만 그 못잖게 책임을 추궁해야 할 것은, 대통령을 둘러싼 시스템 전부다. 청와대는 단체로 기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처음 논란이 불거졌을 때만 해도 청와대는 “사실관계를 확인했는데 절친하지는 않다”고 주장했으며, 연설문 수정 논란에 대해서도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 “시스템으로 성립 자체가 안 되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던 바 있다. 여당 대표는 “나도 연설문 쓸 때 친구에게 물어볼 때가 있다”고 변명했다.

지금이야말로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다양한 장치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여권은 상시청문회법이나 상설특검이 공무원의 직무 수행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진짜 공무 수행을 위축시킨 것은 대통령의 견제 받지 않는 권력과 그로 인해 일개 사인이 개입할 정도로 무너진 공적 구조였다. 의회의 특권은 내려놓되 정부를 견제할 권한은 키우는 개혁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논의의 틀을 부수어버린 것도 대통령이다. 특히 개헌 제안은 최악의 타이밍에 나왔다. 대통령이 제시한 5년 단임 대통령제의 한계는 분명 논의할 가치가 있는 문제다. 다양성의 시대에 더 많은 계층, 특히 소수자의 권리를 폭넓게 보장하기 위한 논의도 마땅히 필요하다. 최순실 스캔들을 가능하게 한 권력 구조 개편을 논해야 함도 물론이다. 하지만 안 그래도 개헌 제안이 국면 전환을 위한 전략이란 의심을 받던 차에, 이 황당한 스캔들은 개헌을 논의할 동력을 부수어버렸다. 개헌을 포함한 국정 체계 개혁을 논의할 마당까지 위축시켰다.

그래도 조소와 농담이 답이 될 수는 없다. 제2의 최순실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 것인가를 이야기해야 한다. 특검이나 청문회를 포함한 상시적인 견제 장치는 물론, 국회의 견제 기능을 정상화하고 활성화할 방안에 대해 양원제나 정원 확대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논의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간절한 바람으로 우주의 도움을 구해야 할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임예인 슬로우뉴스, ㅍㅍㅅㅅ 편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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