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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언니가 돌아왔다

입력
2018.07.13 14:53
수정
2018.07.13 17:51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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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방식으로 불쑥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화들짝 놀란다.

“미안해. 난 여기서 혼자 쉬고 있을게.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예정된 길을 다녀오면 어떨까?” 멋쩍은 표정으로 셋째 언니가 그렇게 말했을 때 우리 자매는 많이 놀랐다. 여행지에서, 그리 높지 않은 산을 오르려 할 때였다. 행여 분위기를 망칠까 주춤거리던 언니가 결국 그 말을 입에 올린 건, 의지로 어찌해 볼 수 없을 만큼 체력이 바닥나 버렸다는 의미였다. 걱정스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우리 일행은 정해진 산행을 했다. 정상에 올라 바라보는 산 아래 풍경이 기막히게 아름다운 만큼 저 아래 그늘에서 홀로 쉬고 있을 언니에 대한 애잔함도 컸다.

사실을 말하자면, 셋째 언니가 이런 식으로 비실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거였다. 어릴 적부터 셋째 언니는 우리 자매들 모두가 부러워하는 강철 체력의 소유자였으니까. 함께 자라는 동안, 후리후리하게 예쁘고 총명한데다 막강 체력까지 지닌 언니는 모든 면에서 우리 형제의 워너비 스타였다. 공부는 기본이고 동생들을 돌보거나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드는 데서도 언니는 발군의 능력을 뽐냈다. 방학 때 들에 나가 일을 돕다 보면 약골인 다른 형제들보다 서너 배 빠른 건 물론이고 웬만한 어른보다 야무지게 일을 해치우기 일쑤였다. 그러고 집에 돌아와 청소하고 햇볕에 널어 말린 빨래까지 거둬들이고 나서 조용히 책상 앞에 앉는 언니 모습을 보자면 어린 마음에도 묵직한 감동이 일었다. 나보다 네 살 위인 언니가 매사 어른처럼 처신하는 게 신기해서 몇 번 물어본 적이 있다. “언니는 언제부터 그렇게 모든 걸 다 잘했어? 막 힘들거나 하기 싫다는 마음은 안 들어?” 그럴 때마다 언니는 자신의 착한 심성도 바지런함도 다 체력 덕인 것처럼 둘러대며 웃었다. “나는 몸이 튼튼해서 그래. 타고난 힘이 있어서 공부하는 것도 농사일 돕는 것도, 약골인 너희들보다 훨씬 수월한 거 아닐까?”

함께 크고 어른이 되는 동안 나는 셋째 언니가 아파서 드러눕는 모습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런 언니가 여행지에서 체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허둥대는 모습이라니. 그걸 지켜보는 형제들 마음은 또 오죽했을까.

그리고 반년이 지나 가족모임을 다시 가졌다. 이번 모임에서 10대 조카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물놀이를 가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셋째 언니를 떠올렸다. ‘물놀이라면, 셋째 언니는 이번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겠구나.’

하지만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일임을 이번에 절감했다. 셋째 언니는 싱싱한 얼굴로 가족모임에 나타났고, 10대 아이들 못잖은 몸놀림으로 파도 풀 사이를 유영했다. 알고 보니 지난번 여행지에서 탈진한 직후 누구보다 심하게 당혹감을 느낀 사람은 바로 언니였다. 걱정에 찬 자매들의 시선을 감지하고 난 뒤 언니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더 이상은 타고난 체력에만 의지해 살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자마자 언니는 곧장 동네 수영장 강습과정에 등록했다. 그리고 타고난 근력 덕인지, 몇 달 사이 스스로도 놀랄 만큼 건강한 몸을 만들었다.

얕은 물에서 놀던 내가 가족들 쪽으로 서둘러 가다 잡고 있던 튜브가 뒤집히는 바람에 물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잽싸게 와서 나를 잡아 이끌어 준 사람은 역시 셋째 언니였다. “더 늦기 전에 너도 몸을 다시 만드는 게 좋겠어. 한동안 방치했던 몸 건강을 챙기면서 알게 되더라. 체력이 살아나니 뭐랄까, 인생관까지 달라지는 걸 느껴.” 콧속에 들어간 물 때문에 잔뜩 찡그린 채로 나는 언니를 바라다보았다. 눈부시던 언니의 한창 때 모습이 살아나고 있었다. 오랫동안 벼르기만 하던 수영 강습과정에 당장 등록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도, 건강하게 다시 살고 싶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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