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등 돌린 딸에게 이메일로 손 내민 이 시대 아버지

알림

등 돌린 딸에게 이메일로 손 내민 이 시대 아버지

입력
2015.05.08 14:12
0 0

독립영화 감독 홍재희씨

돌아가시기 3일전까지 받은 내용을

다큐 이어 책으로 아버지 삶 재구성

"상처받고 분노했던 나를 이해했다"

홍재희 지음 바다출판사 발행·308쪽·1만2,800원
홍재희 지음 바다출판사 발행·308쪽·1만2,800원

‘인생에서 목적을 가지는 것은 죽음에 대한 최선의 방어다.’(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이탈리아 소설가 프리모 레비)

1934년 황해도 황주군 출생. 1947년 38선을 넘어 인천에 정착. 베트남 파견 노동자, 중동건설 노동자를 거쳐 1남 2녀를 키워낸 가장. 실향민 홍성섭씨의 이력은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관통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철거민, 완고한 반공주의자이자 전라도 혐오증자였던 홍씨는 2008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일흔넷 나이로 타계했다.

홍씨는 평생 모은 전재산, 금호동 집이 뉴타운 개발지구 대상으로 논의되자 ‘아파트 입성의 꿈’에 젖어 재개발 동의서에 도장을 찍지만 ‘3억 이상의 분담금을 더 지불해야 아파트 소유주가 될 수 있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에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꼬박 1년을 비대위 사무실로 출근한다. 그리고 레비와 같은 심정으로 가장 사랑하는 딸, 재희에게 편지를 쓴다.

“재희야! 애비의 회고록이라야 그러나 이재 生을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나의 살아온 과거를 알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여 몇 자 적어본다.”

머리가 굵어진 후 ‘징글징글하게 아버지에 맞서다 집을 나와 버린’ 딸은 2008년 1월, 아버지로부터 이메일 한 통을 받는다. 한 자 한 자 독수리 타법으로 친, 군데 군데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틀린 아버지의 메일은 사망 3일 전인 그해 12월 20일까지 딸 홍씨에게 전해진다.

해방 공간에서 열다섯 살이 된 홍성섭은 홀로 38선을 넘고 이내 6·25 전쟁을 맞는다. 젊은 홍성섭은 인천에 정착해 미군부대 파지장사를 하며 여관을 살 정도로 큰돈을 벌었지만 사기를 당해 무일푼 신세로 전락한다. 서독 파견 광부를 자청하고, 베트남전쟁 속에 크레인 기술자로 뛰어든다. 중동 건설 붐이 일자 건설노동자로 사우디에서 모래바람을 맞는다. 서른한 살에 학교 선생과 결혼해 1남 2녀를 낳는다.

그토록 일을 했지만 가진 건 집 한 채가 전부. 그래서 자유로운 해외로 나가길 원했지만 연좌제가 발목을 잡는다. 처남들이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된 ‘빨갱이’라 여권도, 비자도 나오지 않았다. 중동에서 돌아온 그는 실망했고 낙담했다. 그리고 매일 술을 마시며 가족들에겐 꽤나 긴 시간 폭력을 행사했다.

‘가난한 독립영화 감독’인 딸 홍씨는 제 어미를 팔아 소설 ‘눈길’을 써낸 이청준처럼 아비의 편지를 밑천 삼아 영화를 찍었다. 지난 해 4월 개봉된 동명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주변인들의 증언과 사건의 재현을 통해 관객 눈물샘을 자극했다면, 책은 아버지 홍씨의 편지와 딸 홍씨의 담담한 증언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 파란만장한 생을 재구성한다.

삼남매 중 아버지가 가장 편애한 자식인 저자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엇나간 자식이 됐다. 무능한 알코올 의존자, 툭하면 엄마를 두들겨 패는 폭력 가장이 있는 집을 딸 홍씨는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이라고 비유한다.

개인적 고백으로 점철된 이 책은 삶에서 한 단계 성숙할 때마다 제 아버지의 삶에서 멀어져야 했고, 아버지의 가치관을 부정해야 했고 그리하여 종국에는 아버지를 배반해야 했던 모든 개발도상국가 자식들의 회한을 대변한다. 아버지가 이제 딸의 삶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무엇일까.

편지의 답장 격인 책 첫 머리에 딸 홍씨는 이렇게 썼다.

“나는 영화를 통해 더불어 이 책을 통해 망각 속에 파묻었던 아버지를 기억 속으로 불러내 그를 더도 말고 한 인간으로서 이해하려는 길을 떠났다. 그리고 감히 아버지를 용서했다기보다 상처받고 분노했던 어린아이였던 나를 이해하고 용서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