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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길 위의 이야기] 냉장고 청소

입력
2017.02.2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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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엄마는 이른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왔다. “냉장고 다 비워 놔라. 아무 것도 남기지 말고 홀랑 다.” 나는 꾸물꾸물 일어나 냉장고 청소를 했다. 엄마가 우리 집에 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서너 시간 후면 전화가 다시 올 것이다. 지하주차장이니 짐 들러 내려오라고. 예전에는 거의 내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젓갈이나 말린 생선, 겉절이와 깍두기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이젠 다 아기 것이다. 아기에게 구워주려고 엄마가 가져다 주는 조기는 비싼 거라 내가 먹었다간 야단이 난다. 지난번엔 아기 전복죽을 끓이라고 준 전복을 내가 버터 넣고 구워먹었다가 혼쭐이 났다. 오늘도 엄마는 간을 전혀 하지 않은 달큼한 무나물과 호박나물을 잔뜩 만들어 올 것이다. 소고기국도 끓여왔겠지. 엄마 집에서 산후조리를 할 때, 엄마는 아기 기저귀를 갈아줄 때면 한참 아기를 벗겨놓고 부채질을 해주었다. 행여나 쉬야를 할까봐 내가 걱정을 하면 엄마는 큰소리를 쳤다. “야! 아가야가 쉬야 좀 하믄 어때. 괜찮아. 시원하게 싸도 돼.” 아기는 외할머니 말을 하도 잘 들어서 두 번 연이어 이불 빨래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면 엄마가 또 소리를 쳤다. “이 간나가 진짜! 벳겨 노면 바로 쉬야를 하나! 도대체 내가 하루에 몇 번을 이불 빨래를 하나, 어? 인제 고마 니네 집에 가라, 요 간나야!” 그래 놓곤 내가 3주 만에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아쉬워서 막 화를 냈다. 아직 아기에게 이름도 없던 시절이었다. 냉장고를 홀랑 털어 닦아놓았다. 엄마는 한 달은 너끈하게 먹을 것들로 냉장고를 다시 채워주겠지. 김치냉장고에 쟁여놓았던 캔 맥주도 일단 안 보이는 곳에 숨겼다. 엄마가 가고 나면 도로 꺼내오면 될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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