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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헌법재판소 결정을 기다리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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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헌법재판소 결정을 기다리는 자세

입력
2017.02.05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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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은 “친문”이었다. M은 압도적인 친문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청춘을 탕진했다. 친문 세력이 모인다는 집회에는 빠짐없이 참석했고, 호위무사를 자처하며 밤을 새운 적도 허다하다. 친문 패권주의라는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M은 소방호스처럼 솟구쳐 오르는 젊은 에너지를 문씨의 숭배와 옹호에 바쳤다. M이 그러한 열성을 보였던 이유로는 물론 문씨의 생각과 어록이 멋지다는 것도 있었지만, 문씨가 남들보다 잘생겼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문씨가 미남이 아니라는 소수의견은 M의 문씨에 대한 숭배를 더욱 강화했을 뿐이었다.

그러했던 M도 해가 바뀌고 나이가 들자, 한 때의 불 같은 정념을 뒤로 한 채, 먼지로 가득한 사료를 뒤적이며 고고한 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 오늘도 묵묵히 고문서를 해독하고 있는 M으로부터 H.O.T.의 리더 문희준씨가 사용할 침대를 조공하던 열성적인 고교생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M에게 다가가, “음악의 선율이 아닌 내면의 고독을 담기 위해 애썼습니다”라고 문희준이 말한 적이 있다면서요, 라고 놀려본다. 그러면 M은 눈에 불을 켜며 반론을 제기한다. 그 어록은 맥락을 뺀 상태라서 이상하게 들리는 거에요! 그리고는 아직도 친문 직계조직이 살아 있음을 상기시키며, 문희준씨에 대한 비판은 용납지 않겠다는 결연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얼마 전 문희준씨가 결혼 계획을 발표했을 때, 이러한 M이 받았을 충격은 얼마나 컸을까. 해당 뉴스의 링크를 문자로 보내주자, M은 이렇게 응수했다. “여기저기서 위로 문자를 빙자한 뭔가가 오고 있습니다 ㅋ 제 청춘을 이렇게 보내네요. 평생수절.” 이제 M은 중국 남자배우 호가(胡歌)라도 지켜내겠노라고 결심을 다지고 있다.

아, 실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 사랑을 통해서 인생의 권태를 이겨내고, 사랑의 상상 속에서 협애한 자아를 넘어 보다 확장된 삶을 경험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인간들은 대부분 사랑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 누추하다. 깔끔한 용모는커녕, 화장실에서 손도 씻지 않는 존재들도 적지 않다(내 직장에서 누가 용변 뒤 손을 씻지 않는지 나는 알고 있다). 일상의 인간들이 사랑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기꺼이 다른 세계로 사랑할 대상을 찾아 떠난다. 연예인이나 정치인을 상대로 한 “팬질”에는 유구한 역사가 있다. 실로 M이 연구하는 분야의 사료에 따르면, 옛 정치인들은 모두 대단한 미남 미녀였다. 그들은 발성이 좋고, 이목구비가 바르고, 잘 씻어 얼굴이 빛났다. 예컨대 삼국사기에서는 “조분이사금은 키가 크고 풍채가 아름다웠으며… 흘해 이사금은 용모가 준수하고… 눌지 마립간은 모습이 시원스럽고 우아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아이돌 그룹이 달리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대에는 정치지도자들이야말로 백성들의 아이돌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이제 아이돌 산업이 충분히 발달한 현대의 시민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현대 아이돌 산업의 발전이 가져다 준 축복 중의 하나는, 우리는 굳이 정치인에게서 아이돌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꺼이 2D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실로 2D 캐릭터는 영원하다. 예컨대 “킹 오브 프리즘”의 주인공들은 영원히 배가 나오거나 주름이 생기지 않아, 장시간에 걸친 성형수술을 받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면, 헌재의 결정을 기다리는 일이 아이돌 팬클럽끼리 승부 결과를 기다리는 일이 될 필요는 없다. 탄핵 여부를 숙고하는 일은, 특정 정치인에 대한 개인적인 호오(好惡)의 사안이 아니라, 우리가 헌법을 가진 존재라는 일을 상기하는 일이다. 우리가 각자도생하며 사적 이해 추구에만 골몰하는 유글레나가 아니라, 공적 삶을 위한 일정한 가치에 합의한 바 있고, 그 가치를 심각하게 배반했다고 판명되는 경우에는 가장 힘센 권력자마저도 권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은 아이돌 숭배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보다 확장되고 고양된 삶을 살게 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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