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박선영 기자

등록 : 2017.12.02 04:40
수정 : 2017.12.02 09:36

[잊혀진 청년들] 아무리 일해도 가난한, 나는 고졸입니다

등록 : 2017.12.02 04:40
수정 : 2017.12.02 09:36

#1

인문계고 출신 23세 장지훈씨

박봉에도 보안경비 평생직업 꿈

8개월 만에 회사 폐업 판매직 전전

경력ㆍ진로 기회 못 찾고 빈곤층 삶

#2

생계 쫒겨 졸업과 동시에 취업 내몰려

저임금→잦은 이직→낮은 숙련도 ‘악순환’

“어리고 만만하다고 다른 팀 일까지 시켜

3일 이상 못 쉬어… 여행이 소원이에요”

#3

정부 청년정책은 대졸자들에 초점

일정 기간 경제적 압박서 벗어나

인턴 등 경험 통해 진로모색 하도록

선진국 ‘갭 이어 정책’ 도입해야

대학에 가지 않은 고졸 청년들은 졸업과 동시에 내동댕이쳐지듯 취업시장에 투입된다. 그러나 이들에게 주어지는 일자리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 대부분. 대학이 미래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해도, 대학졸업장 없이 맞닥뜨린 세상은 너무 험하고 힘겹다. 고졸 직장인 장지훈(가명)씨가 26일 서울 한 지하철역의 출구를 향해 계단을 오르고 있다. ‘저 바깥에 과연 나를 위한 자리가 있을까.’ 류효진기자

장지훈(가명ㆍ23)씨의 첫 직장은 서울의 한 백화점이었다.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들어가 월급 150만원을 받는 판매직으로 일했다.

인문계고를 졸업하고 지방 전문대에 합격했지만, 등록하지 않았다. 한 학기 등록금이 300만원이 넘는데, 그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다니기엔 가성비가 너무 낮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세상에 빨리 나가 일을 하자.’ 부모님은 ‘빚을 내서라도 대학을 가야 하지 않겠냐’며 아쉬워했지만, 경제적 지원을 해줄 형편은 안 됐다. 고등학교 때부터 퀵서비스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던 그였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희망들아’

군 입대로 1년 만에 백화점을 그만두고 전역 후 찾은 일자리는 작은 무인경비업체 영업직.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폐쇄회로(CC)TV나 경보기 설치 계약을 따오고 설치를 보조하는 업무였다. 월요일 오전 9시 전라도, 화요일 오후 5시 경상도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다. 잠도 못 자고 달려가거나 전날 미리 내려가 근처에서 자고 현장으로 곧장 출근해야 하는 날이 많았다. 하루 평균 13~15시간을 정신 없이 일했다. 그렇게 해서 받는 월급이 세전 110만원. 4대 보험료 등을 공제하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은 96만~97만원이었다. 월세 35만원, 휴대폰요금 10만~15만원을 내고 나면 월급의 절반 가까이가 사라지건만, 영업 성과급을 따내 월 30만원씩 불입하는 적금을 두 개나 들었다. 적금은 얼마 전 누나 결혼비용에 보태느라 다 깼다.

“워낙 오래 일을 하니까 돈 쓸 시간도 없더라고요.” 머쓱하게 웃던 장씨는 이 보안업체가 “그래도 미래를 걸었던 직장이었다”고 했다. 8개월 만에 회사가 문을 닫아 의류업체 판매직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지만, 보안경비 분야는 착실히 경력을 쌓으면 평생 직업으로 삼기에 희망이 있다고 여겼다. 하루 15시간에 육박하는 근무시간도,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도 그래서 불만이 없었다. “일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업종 기술이랑 커뮤니케이션 스킬 전부 배우고 싶었어요. 그런데 일을 가르쳐 주려고 하지를 않더라고요. 설치 기사가 총 15명이었는데, 심부름 같은 보조 업무만 시켰어요. 다 그렇게 배운다고는 하지만 너무 답답했죠.”

평범한 직장에 오래 다니며 평범한 월급 받아 평범한 삶을 사는 것. 고졸 직장인 장지훈씨의 꿈이다. 류효진기자

장씨는 현재 분전함, 가로등, 신호등 같은 도로설비물의 설치 영업을 ‘야리끼리’(할당) 받아 건수를 채우고 월 90만~120만원을 받는다.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따 인사ㆍ노무 쪽으로 취업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당장의 생계비를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라, 공부에만 매달릴 수 없는 게 요새 그를 가장 힘들게 한다. 고용노동부의 취업성공패키지도 시도해 봤지만, 기초 상담과정인 1단계만 4주나 걸려 포기했다. 3단계 취업 알선까지 6~12개월이나 걸리는 그 긴 과정을 생업을 내팽개친 채 수료할 수 있는 건 그나마 형편이 좋은 사람들. 정부가 지원하는 참여수당은 1단계 상담 과정이 15만~25만원, 2단계 훈련 과정이 최대 28만4,000원이고, 3단계 취업 알선 과정은 최대 3개월 지원해주는 구직촉진수당 30만원이 전부다. 식비와 교통비만으로도 빠듯한 액수다.

“최근에 유명 의류매장 판매직으로 1년 넘게 일하며 월 180만원을 벌었어요. 주5일 근무제에 근무시간도 하루 10시간으로 딱 정해져 있고, 점심 저녁 식대도 제공됐죠. 지금 당장 안주하고자 하면 이만한 직장도 찾기 어려울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저랑 똑같은 급여를 받으며 4, 5년씩 일한 형, 누나들을 보니까 미래가 안 보이더라고요. 경력도 못 쌓고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서비스직은 직위 체계가 없어서 싫어요. 차근차근 체계 밟으며 승진도 하고, 연봉도 오르는 그런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고 싶어요.”

그에게 이 정도면 만족한다 싶은 월 급여가 얼마인지 물었다. 150만원이라고 했다. 추후 경력이 쌓여 오르기만 한다면 3년이든 5년이든 이 정도로 만족한다고. “꿈이요?” 그가 웃으며 반문했다. “부귀영화 누리고 돈 많이 버는 그런 건 진짜 바라지 않아요. 많이 못 벌어도 안정적인 직장에서 평범한 월급 받으며,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너무 힘들지 않게, 그저 평범하게, 평범하게요….”

청년정책 쏟아지지만 대졸 위주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만년 1위인 대한민국의 대학진학률은 2009년 77.8%로 정점을 찍은 이래 꾸준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금융위기 여파로 줄어들기 시작해 지난해 처음 60%대로 떨어진 데 이어 올해 0.9%포인트 더 하락한 68.9%를 기록했다. 반면 2009년 16.7%로 최저점을 찍은 직업계고(특성화고+마이스터고+일반고 직업반) 취업률은 매년 증가, 올해 50.6%로 17년 만에 처음 졸업생 절반을 넘겼다.<표 참조> 연 1,000만원에 육박하는 비싼 등록금과 만성적 대졸 취업난으로 대학이 더 이상 미래를 위한 합리적 투자처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고졸 취업이 금융위기 이후 고착화된 저성장 기조와 더불어 되돌릴 수 없는 시대적 추세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 청년의 20~30%를 차지하는 고졸 청년들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앞다퉈 쏟아내는 각종 청년 지원정책의 실질적 수혜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청년담론이 폭발하며 온갖 청년정책이 거론되고 있지만, 이때의 ‘청년’은 누가 꼬집어 말하지 않아도 ‘대졸 취업 준비생’으로 자동 번역된다. 예컨대 구직활동촉진수당으로 최대 6개월간 월 50만원씩 주는 서울시 청년수당은 ‘재학(휴학) 중이 아닌 미취업 청년’이나 ‘주 30시간 미만 근로 청년’만 지원할 수 있다. 고교 졸업 후 미취업 상태인 청년은 지원대상이 되겠지만, 대부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 더 나은 일자리를 찾고자 하는 고졸 청년들은 실질적 혜택을 입기 어렵다.

고졸 취업자 대부분은 눈 앞에 닥친 생활비 때문에 돈을 벌고 있지만 저임금이고, 저임금이라 장시간 노동이 불가피하며, 노동시간이 길어서 별도의 직업훈련이나 구직활동을 하기 어려운 악순환에 처한다. 노동시장에는 고졸에 대한 차별과 저임금ㆍ비숙련 고용의 불안정성이 여전하고, 그 결과 고졸 청년들은 연관성 없는 직종으로의 잦은 이직과 체계적인 숙련축적 부재에 맞닥뜨린다. 시간이 흘러도 저임금은 개선되지 않는다. 청년정책의 사각지대에 소외돼 있는 고졸 워킹푸어는 소득빈곤과 시간빈곤이라는 이중의 가난에 시달리고 있으며, 점차 비중이 늘고 있는 이들을 위해 특단의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희망마저 가난한, 고졸 근로빈곤층

한국일보가 1일 입수한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의 ‘고졸 청년 근로빈곤층 사례연구를 통한 정책대안’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고졸 청년들은 부모의 경제적 곤궁이나 관계 악화로 인해 노동시장으로 밀려나오듯 비진학 결정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이라는 돈이 많이 드는 투자에 나설 만한 여력이 안되거나 투자를 하더라도 충분한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중첩되며 이들은 ‘차라리 돈을 벌자’는 생각으로 진지한 진로 모색의 시간 없이 노동시장에 내던져지듯 진입한다. 적성이나 희망, 장기적 경력 계발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못한 상태로 당장 경제적 문제를 해소할 수 일자리를 찾지만, 이 같은 경제적 압박 속에서 지속적인 경력을 형성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고용상ㆍ업무상 차별로 인해 숙련을 형성할 기회마저 적다.

보고서에 따르면, 특성화고나 마이스터고 같은 직업계고보다 인문계고를 졸업한 청년들이 노동시장에서 훨씬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직업계고도 취업률 높이기에만 골몰한 학교 측이 적성과 무관한 업체로 학생들을 취업시켜 근속을 어렵게 하는 문제점이 있었지만, 인문계고 졸업생은 학교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노동시장에 진입, 오랜 기간 저숙련 노동을 전전하고 있다.

인문계고 졸업 후 월 급여 150만원을 받으며 카페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는 25세 여성 A씨는 연구진과의 인터뷰에서 “저처럼 고졸인데 한 직장에 정착하지 않고 조금씩 일했던 사람들의 근로상태를 보면 대부분 급여가 130만원 아니면 그보다 적게 받는다”며 “몇 년이 지나도 급여나 사회적 위치에서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항상 쫓겨서 일을 하는 것 같아요. 그 잔고의 스트레스. 어디에 돈 나가야 되는데…. 늘 그러니까 선택의 폭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조금 더 여유롭다면 ‘내가 이걸 조금 줄이고 이걸 투자하면 되겠다’ ‘이걸 하고 이건 다음에’라는 선택권이 있잖아요. 그런데 가난이라는 건 ‘이걸 해야 되는데, 이것도 해야 되는데, 할 수가 없다’인 것 같아요. 그래서 거기에 대한 압박감이 들고, 스트레스가 쌓이고, 예민해지고, 돈을 쫓고.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B씨ㆍ26ㆍ남ㆍ카페 바리스타, 일반고 졸업)

업무와 적성의 미스매치로 이직이 잦은 고졸 청년들은 경력을 통해 숙련을 형성하기가 어렵다. 당장의 생계 때문에 일을 멈출 수 없는 이들에게는 진지한 진로 모색에 투입할 시간이 없다. 길 건너 한 매장에 ‘직원 구함’ 안내문이 붙어 있다. 류효진 기자

고졸이라고, 어리다고… 끝없는 차별

“제가 입사하고 8개월 됐을 때, 대졸자 신입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현수막에 어떤 그림이나 글꼴을 넣어야 할지도 모르더라고요. 우연히 다른 분한테 들었는데 그런 완전 신입한테 월급을 200만원이나 준다는 거예요. 단지 대졸이라는 이유만으로 경력도 없이 주임 직급부터 시작하는 걸 보고 대학은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월 소득 150만~160만원만 되면 굳이 대학 진학은 하지 않을 텐데….”(C씨ㆍ20ㆍ남ㆍ인테리어 디자이너, 특성화고 졸업)

명문대를 가기 어려울 바에야 빨리 실무 전선에 나가겠다는 생각에 특성화고에 진학하고, 전공과 연계된 일자리에 졸업과 동시에 취업한다. 그러나 이런 가장 바람직한 경우도 업무와 급여 차별로 인해 이직이 잦다. 회계 업무를 하면 자료 엑셀 정리만, 인사 업무를 하면 한글 파일 정리만 고졸에게 주어지고, 본 업무는 대졸자에게 가는 식이다. 단순업무만 반복하니 경력이 쌓이지 않고, 임금 역시 오르지 않는다.

“건설회사 다닐 때 급여 업무를 하다 실수를 한 적이 있어요. 엄청 화가 난 상무님이 ‘고졸인 거 티 내냐’ 하시는데, 아직까지도 그 말이 상처가 돼요. '애 수준에 맞게 일을 줘야지’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이건 대졸도 실수할 수 있는 거잖아요.”(D씨ㆍ21ㆍ여ㆍ비서)

마이스터고를 졸업한 오솔희(가명ㆍ22)씨는 전문고 대상 취업박람회에서 면접을 보고 치과 의료기기 제조회사에 입사했다. 3개월만 인턴을 하면 정규직이 되는 줄 알고 세후 110만원도 안 되는 월급에도 입사를 결정했지만, 도중에 인턴 기간이 6개월로 연장됐다. 밤 9시가 다 되도록 이어지는 업무도 과중했지만 “나이가 어리니까 만만해서” 차별 당했던 게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제가 어리니까 다른 팀에서도 막 일을 시켰어요. 소속 부서인 품질관리팀에서는 야근을 안 시키는데 생산직 부서에서 야근 시키라고 부장님한테 연락이 오는 식이었죠.” 고3 나이로 그런 차별에 제대로 대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졸 직장동료에 비해 어린 나이는 나이에 따른 위계가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국사회에서 고졸이라는 학력과 상호작용하며 고졸 청년들을 중첩적인 차별, 무시, 폭언에 노출시킨다. 1년도 채우지 않고 치과장비 판매업체로 이직한 오씨는 내년 전문대에 진학해 플라워 디자인 기술을 배울 예정이다.

각종 차별에 시달리며 미래 비전의 부재를 절감한 고졸 청년들에게 대학 후진학은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다. 특성화고 졸업 후 산업기능요원으로 웹 에이전시에 취업한 선형진(가명ㆍ23)씨는 현재 야간대학 4학년이다. 어릴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관심이 많아 대회 입상도 여러 차례 한 그는 컴퓨터 전문가의 길을 가겠다는 확신으로 부모 반대를 무릅쓰고 특성화고에 진학했다. 관공서의 홈페이지를 제작, 관리하는 현재 회사에도 “고졸로 평생 살겠다는 생각으로 입사”했다.

하지만 “너희들은 쟤들 4년제 대학 나올 때 뭐 했냐?”며 대놓고 차별 발언을 일삼는 전무를 보며 결심이 흔들렸다. “제가 지금 대학에서 배우는 것들은 실무에 전혀 쓸모가 없는 것들이에요. 졸업장 하나 때문에 다니는 겁니다. 4년치 등록금을 한꺼번에 내고 졸업증서 하나만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걸 선택하고 싶을 정도죠.” 세후 153만원의 적은 급여, 프로젝트 마감 시즌이면 한 달씩 집에도 가지 못할 정도의 격무, 실력과는 무관한 학력 차별. 이 모든 게 선씨는 지긋지긋하다. ‘연봉 3,000만원의 직장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며 대리가 되고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되는 삶. 그런 삶을 나도 가질 수 있을까.’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미래를 생각하면 자꾸 겁이 나요. 자신이 없죠. 자꾸만 겁이 나서….”

고졸 근로빈곤층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적성에 맞는 진로를 찾아 경력을 쌓는 것이다. 소득과 시간이 모두 부족한 이 청년들을 위해서는 진로이행기 소득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류효진 기자

꿈을 찾을 ‘시간’이 필요하다

“당장 돈을 적게 주더라도 배울 수 있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경력의 일을 해야 해요. 알바는 절대 안 돼요. 5년 동안 11개 직장에 다녔는데, 전공했던 포토샵 관련 직장에서만 연봉을 조금씩 올릴 수 있었어요. 야간 공장 알바도 한 적이 있거든요. 하지만 그런 건 나중에 전혀 도움이 안 돼요.”(E씨ㆍ25ㆍ여, 특성화고 졸업)

진로 모색과 경력 형성. 고졸 청년들이 지속 가능한 안정적 삶을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두 가지다. 특히 인문계고 졸업생은 카페 바리스타에서 백화점 판매직으로, 콜센터 상담원으로, 상호 업무 연관성 없는 직업으로 자주 이동하면서 장기적 경력 방향에 대한 모색 없이 노동이력을 이어간다. 사회적 관계망마저 취약해 진로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어려움을 겪어도 논의할 창구가 없다. 학교 바깥에 섬처럼 덩그러니 고립돼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보고서는 “고졸 근로빈곤층이 노동시장 진입과정에서 가장 먼저 부딪히는 진로모색의 문제를 해결하고, 성인 초기에 일정한 일반적 숙련을 지원할 수 있는 정책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진로 모색을 위한 프로그램과 일 경험기회 제공 ▦노동시장에 필요한 일반 스킬과 노동법 교육 ▦기타 고용서비스로의 연계 등을 제공하는 고졸 청년들을 위한 노동시장 안착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특히 “고졸 근로빈곤층이 진로를 모색할 수 있는 경제적ㆍ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이 시급하다”며 “서울시가 시행 중인 청년수당이나 선진국의 갭이어(gap year) 정책 등을 통해 고졸 청년 스스로가 생활의 압박에서 벗어나 스스로 진로를 모색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년들이 일정 기간 여행, 봉사, 인턴, 창업 등의 활동을 하며 진로를 탐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서울형 청년 갭이어’ 사업은 올 여름 서울시 청년의회가 제안, 현재 논의 중이다.

“일정 기간을 주고 소득을 좀 지원해줘서 네가 하고 싶은 걸 찾아봐라 그런 게 있으면 좋을 거 같아요.”(F씨ㆍ27ㆍ여ㆍ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 “공부만 할 수 있게끔 지원해주는 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할 수 있게. 제가 보기에 고졸은 중간에 포기를 많이 해요. 그러니까 끝까지 할 수 있는 걸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요.”(G씨ㆍ32ㆍ여ㆍ택배기사)

소득빈곤이 ‘생계형 묻지마 노동’으로 이어지고, ‘묻지마 장시간 노동’이 시간빈곤으로 이어지는 고졸 청년들에게 램프의 요정이 나타난다면 그들은 무슨 소원을 빌까. “여행이요, 해외여행. 친구들이 저한테 ‘넌 항상 보면 여유가 없다’고 해요.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욕을 들어가며 일할 때, 막내 동생과 일주일간 일본여행을 한 적이 있어요. 엄청 좋았죠. 아, 왜 사람들이 해외에 나가는지 알겠더라고요.”(F씨) “단 3일만이라도 돈 걱정 안하고 배낭 메고 여행을 가고 싶어요. 한국에서 사는 것, 너무 힘들고 지쳐요.”(D씨)

쉴 새 없이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하는 노동뿐인 삶. 소득과 시간의 이중 가난 속에서 허덕이는 청춘. 단 며칠 만이라도 여행을 가보는 게 이토록 간절한 꿈인 고졸 워킹푸어 청년들을 보며 램프의 요정 지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오희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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