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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다시 없을 그린피스의 전설, 존 캐슬

입력
2018.02.24 04:3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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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적 본능적인 선장

영국해협 섬사람으로 태어나

항해사로 일하다가 환경 활동

출항 첫해부터 나포 구금 탈출

배 한 척으로 맞서다

영국의 노후 원유탱크 수장 시도와

프랑스의 남태평양 핵실험 계획을

온몸으로 고발하고 철회시켜

그린피스 관료화ㆍ기업화에 반기

"초심 잃고 돈ㆍ이미지만 신경"

양복쟁이들에 밀려 한때 떠나

5년 뒤 복귀, 말년까지 감시 소임

1995년 영국 석유회사 셸의 해양원유설비 '브렌트 스파' 해양투기와 프랑스 핵실험 저지 캠페인 등을 성공적으로 이끈 해양감시선 레인보우 워리어 호의 선장 존 캐슬이 별세했다. 그린피스 원년의 정신을 가장 선명하게, 마지막까지 견지했던 그는 조직의 리더들보다는 젊은 활동가들에게, 어쩌면 조직내부보다 바깥에서 더 사랑 받았을 것이다. 2000년 8월 지중해 독성물질 폐기 저지 캠페인을 벌이던 때의 존 캐슬. 그린피스 제공
1995년 영국 석유회사 셸의 해양원유설비 '브렌트 스파' 해양투기와 프랑스 핵실험 저지 캠페인 등을 성공적으로 이끈 해양감시선 레인보우 워리어 호의 선장 존 캐슬이 별세했다. 그린피스 원년의 정신을 가장 선명하게, 마지막까지 견지했던 그는 조직의 리더들보다는 젊은 활동가들에게, 어쩌면 조직내부보다 바깥에서 더 사랑 받았을 것이다. 2000년 8월 지중해 독성물질 폐기 저지 캠페인을 벌이던 때의 존 캐슬. 그린피스 제공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의 활약을 소개하는 자료에 고명처럼 얹히는 사례로, 1995년 여름 영국 ‘브렌트 스파 Brent Spar’ 시위가 있다. 브렌트 스파는 영국과 미국 석유회사 셸(Shell)과 에쏘(Esso)의 공동 소유로 셸이 운영하던 북해 브렌트 유전의 이동식 원유저장탱크로, 유정에서 채취한 원유를 모았다가 해안으로 견인해 파이프라인으로 세틀랜드(Shetland) 육상 기지로 옮기는 데 쓰인, 30만 배럴급(약 4,700만 리터) 해상 저장시설이다. 셸은 90년대 산유량이 줄고 설비가 노후화하자 76년 설치된 브렌트 스파를 폐기하기로 결정, 영국 정부의 허가 하에 해상 폭파-수장키로 결정했다. 폐기 지점은 스코틀랜드 서쪽 250km 해상의 수심 2.5km 노스페니리지(North Feni Ridge). 물론 쉬쉬하며 추진된 일이었다.

견인이 막 시작되려던 1995년 4월 30일, 그린피스 해양감시선 ‘모비 딕(Movi Dick)’호가 브렌트 스파 현장에 등장했다. 활동가(Activist) 등 25명은 밧줄로 브렌트 스파 플랫폼에 올라 플래카드를 펼치고 점거농성을 시작했다. 설비 자체도 문제지만 탱크 안에 남은 원유찌꺼기로 인한 오염으로 북해ㆍ대서양 해양생태계와 어민들의 피해가 불가피하다는 게 그린피스의 주장이었다. 활동가들은 원유찌꺼기 샘플을 채취해 성분 분석을 의뢰하는 한편, 탱크 내 찌꺼기가, 셸이 밝힌 최대 50톤이 아니라, 약 5,500톤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활동가들은 헬기와 물대포, 크레인 등을 동원한 영국 해경에 의해 농성 20여 일 만인 5월 23일 체포돼 에버딘(Aberdeen) 구치소로 연행됐다.

하지만 브렌트 스파 시위는 신문ㆍ방송 등을 통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바다를 공유한 유럽 시민ㆍ국가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5월 9일 독일 정부는 공식 반대 성명을 발표했고, 6월 초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헬리팩스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도 영국 총리 존 메이저를 궁지에 몰았다. 네덜란드와 독일 등 유럽 시민들은 셸 주유소에 불까지 지르며 거센 불매운동을 벌였다.(good-nonprofit.com)

그린피스 활동가들은 풀려나자마자 앨테어(Altair) 호를 몰고 수장지로 끌려가던 브렌트 스파를 추격, 다시 플랫폼에 올라 원격 기폭장치 배선을 끊고 농성을 시작했다. 해경과 대치하던 그들은 그린피스 지도부의 승인 없이 인근 해역의 헬리포트를 갖춘 감시선을 호출, 헬기로 농성자를 증원하기도 했다.

셸은 6월 20일, 브렌트 스파 해상폭파 계획을 철회한다고 공식 발표했고, 3년 뒤 북동대서양 해양보전국제기구(OSPAR)는 유전시설의 해양 폐기를 금지했다. 로열더치셸은 2011년 브렌트 유전 플랫폼 ‘브렌트 델타(상부 무게만 2만4,000톤)’를 시작으로, 북해유전 시설의 육상 해체를 시작했다. 북해에만 470개 플랫폼과 5000여 개 유정, 1만km에 이르는 파이프라인이 모두 육상에서 2050년까지 해체될 예정이다.

‘대첩(大捷)’이라 할 만한 저 싸움을 기획하고 현장에서 이끈 이가 그린피스의 전설적 활동가이자 선장 존 캐슬(Jon Castel)이었다. 그는 이듬해 프랑스 핵 실험 저지를 위해 레인보우 워리어II를 몰고 프랑스령 남태평양 폴리네시아 무루로아(Mururoa) 환초로 급파됐다. 프랑스 해군에게 나포되지 않도록 공해상에서 시위를 벌이라는 게 그가 받은 지침이었지만, 그는 그 지침을 무시했다. 불의에 최대한 다가가, 저지하고 고발하고 고통스럽게 지켜봐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캐슬은 돛대 위 망대(crow’s nest)에서 원격 조종할 수 있도록 배를 개조해 망대에 오른 뒤 사다리를 철거하고 돛대에는 기름을 발라 군인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해군은 선박을 나포해 사령실을 점거한 뒤로도 ‘저절로’ 움직이는 배를 통제하지 못하다가 12시간 만에야 사태를 파악하고 엔진 케이블을 끊었다.(independent.co.uk) 배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하오(Hao)섬으로 견인됐고, 영국과 스웨덴 캐나다 독일, 호주, 일본 등지에서 모인 3,000여 명은 수도 파페에테(Papeete)항에 모여 그들을 응원했다. 프랑스의 마지막 핵 실험이 그해 12월 무루로아 환초에서 이뤄졌다. 유엔은 그 해 9월 모든(우주, 대기권, 수중, 지하) 핵실험을 금지하는 내용의’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을 채택했고, 98년 4월 프랑스도 조약을 비준했다.

강대국 군대와 다국적 기업의 거대한 힘에 가랑잎 같은 배 한 척으로 맞서며, 인류에게 평화와 생명, ‘사회적 책임 Corporate Responsibility’이란 말을 알게 한 “다시 없을 그린피스의 전설”, 존 캐슬(Jon Castle)이 1월 12일 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67세.

1995년 5월 브렌트스파 첫 점거농성 당시의 존 캐슬. 그린피스.
1995년 5월 브렌트스파 첫 점거농성 당시의 존 캐슬. 그린피스.

1971년 미국 알래스카 알류션(Aleutians) 열도 끝 화산섬 암치트카(Amchitka) 핵실험 반대해상 시위를 계기로 72년 출범한 그린피스는 2016년 현재 남극을 뺀 전 대륙 26개 지부와 55개 사무소에, 정규 직원만 2,444명(여성 1,250명)이 일하는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다. 기업ㆍ정부 지원 없이 오직 개인들이 2016년 한 해에만 3억4,200만 유로(약 4,500억 원)의 후원금을 냈고, 1,138개 도시 5만여 명의 봉사자들이 다양한 환경캠페인과 액션에 힘을 보탰다.(2016 annual report) 환경 이슈와 분야가 확장되고 다양화하면서 조직도 분화했다. 원년 멤버들은 각자가 전략가이자 액티비스트였지만, 이제는 글로벌ㆍ지역ㆍ사무소 단위마다 캠페인 기획과 조사, 활동, 모금, 로비, 홍보를 맡는 이들이 따로 있다. 관료화, 분절화에 대한 안팎의 비판도 오래 전부터 제기돼 왔다. 전략ㆍ지침을 정하는 지도부와 현장의 불화, 본부- 지부- 사무소의 갈등, 파트별 알력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린피스 역사상 가장 빛나던 시기인 95, 96년은 갈등이 극명하게 표출된, 위기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 중심에, 싸움의 본능과 현장의 판단을 좇기로 ‘악명’ 높던 올드 보이의 대표주자 캐슬이 있었다.

"Save The North Sea" 문구의 플래카드가 펼쳐진 브렌트스파 플랫폼. 저 문구는 그들의 농성 소식과 함께 전 세계에 알려졌고, 원유설비 해상 투기 금지 조약을 만들어냈다. 그린피스
"Save The North Sea" 문구의 플래카드가 펼쳐진 브렌트스파 플랫폼. 저 문구는 그들의 농성 소식과 함께 전 세계에 알려졌고, 원유설비 해상 투기 금지 조약을 만들어냈다. 그린피스

95년 9월 브렌트 스파의 잔존물질이 그린피스 추정과 달리 10톤 남짓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린피스는 영국 보수당 정부와 보수언론의 거센 비난에 휩싸였다. 당시 그린피스 사무총장(Lord Melchett)은 셸 측에 공개 사과했고, 그린피스 국제사무총장(Richard Titchen)은 “사람들은 흔히 과도한 열정으로 활동의 의미를 부풀리기도 하지만, 그건 결코 정당화할 수 없는 문제다. (활동가들의) 과장과 오류는 해고 사유(sackable offence)에 해당된다”고 밝혔다. 망루에서 배를 조종해 12해리 프랑스 영해를 넘어선 96년 레인보우 워리어II의 시위 역시 징계 사유였고, 타히티 반핵운동가 겸 (항프랑스) 독립운동가 오스카 테마루(Oscar Temaru)가 배에 동승한 것도 그린피스의 핵심 원칙 중 하나인 ‘비정치성(apolitic)’을 위반한 것으로 지적 당했다. 그린피스 남태평양 지역 리더(Coordinator) 스테파니 밀스(Stephanie Mills)는 경고를 받았고, 핵실험 반대 리딩 캠페이너 울리치 유르겐스(Ulich Jurgens)는 사임(사실상 해임)했고, 런던사무소의 ‘양복쟁이’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존 캐슬도 별도 조사를 받았다.(socialist review, 1995.11) 그 무렵 그린피스의 헤게모니는 “멋도 모르면서 어깨에 힘만 주고 다니는” 활동가들의 SAS(영국 육군특수부대) 이미지를 탈색하고, 넥타이 매고 기업ㆍ정부와의 대화ㆍ로비에 치중하던 이른바 ‘모더나이저 Modernisers’들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78년 자원봉사자로서, 그린피스 창립 멤버 중 한 명인 데이비드 맥터거트(David McTaggart, 1932~2001)를 만나 함께 영국정부 소유 퇴역 어로조사선을 고르고, 무지개를 그려 넣고, 초대 선장 닉 힐(Nick Hill) 휘하의 1등 항해사가 돼서는 상업포경 저지 운동서부터 반핵까지 근 20년 동안 대양을 누빈 캐슬도 그 해 그린피스를 떠났다.

제임스 캐슬(James ‘Jon’ Castle)은 1950년 12월 7일, 영국해협의 왕실령 건지(Guernsey)섬 코보(Cobo)만의 영어교사 아버지와 유아교사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바다와 가장 가까운 게 그의 집이어서, 그린피스처럼 바다에서 나고 자라다시피 했던 그는 세인트피터 항의 엘리자베스 칼리지를 나오자마자 해양대학 격인 사우샘프턴 상선학교에 다시 입학, 유년시절의 꿈이었다는 뱃사람이 됐다. 그는 선박회사에 취직해 항해사로 일하며, 해양보호 등 환경봉사 활동을 병행하던 78년 맥터거트를 만나 직장에 사표를 내고 레인보우 워리어호에 승선했고, 2년 뒤 선장이 됐다. 레인보우 워리어I호는 프랑스 핵실험 항의 시위 차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정박해 있던 85년 7월 7일 새벽, 미테랑 사회당 정부의 대외안보총국(DGSE) 소속 특수요원들에 의해 폭파됐다.

캐슬의 전설은 출항 첫해부터 시작됐다. 영국 그린피스 설립자 중 한 명인 피터 윌킨슨 등과 함께 그는 78년 7월, 영국의 방사능 폐기물 해양 투기 선박 ‘젬 Gem’호를 좇으며 스페인 비스케이(Biscay) 해까지 해상 시위에 나섰다. 젬호 선원들이 방사능 폐기물 통을 캐슬 등이 탑승한 고무보트에 집어 던진 일도 있었다. 그들은 배와 함께 영해 침범 혐의로 스페인 당국에 체포됐지만, 얼마 뒤 극적으로 탈출해 배와 함께 더블린 항으로 귀환했다. 당시 선원이던 시몬 홀랜더(Simone Hollander)는 귀항 전날 존이 전 승무원에게 배 대청소를 제안했다고, “동료애를 고양하는 것을 넘어 배에 대한 뱃사람들의 도리를 다하자고 말했다”고 전했다. 방사능물질 해양 투기는 93년 11월 런던협약 당사국총회에서 전면 금지됐다.(good-nonprofit)

워리어 호는 2년 뒤인 80년, 노르웨이와 스페인 포경선 상업포경 방해 사위로 또 다시 스페인 당국에, 이번에는 엘 페롤(El Ferrol) 해군기지에 나포됐다. 스페인 당국은 캐슬과 승무원들을 약 5개월간 구금했고, 100만 페세타의 포경 차질 보상을 요구했다. 그 해 11월, 존과 승무원들은 또 한번 해군 감시망을 뚫고 워리어호를 끌고 탈출, 저지(Jersey)항으로 귀환했다. 적선(敵船)이 아닌 성가신 NGO 선박이라 스페인 해군의 경비도 허술했겠지만, 그들 원년 활동가들의 투지와 사기도 사뭇 달랐을 것이다. 훗날 캐슬은 그걸 ‘도덕적 용기 Moral Braveness’라 말했다.

파동 직후인 96년은 그린피스 출범 25주년이 되던 해였다. 그 해 11월, 맥터거트와 윌킨슨, 캐슬 등 그린피스 원년 리더 16인은 그린피스의 운영 민주화와 탈관료화, 탈기업화 등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independent, 1996.11.3) 그들은 이례적으로, 간부들의 과도한 급여 수준과 위계적 조직문화를 비판했다. “그린피스의 선명하고 순수하고 직접적인 운동 방식에 감명받아 후원에 나선 많은 이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된 직급별 급여 편차에 실망해서 이탈하고 있다”고도 썼다. 1990년 480만 명이던 후원자는 그 무렵 300만 명 수준으로 격감했다. 사회주의 진보매체 ‘Socialist Review’는 논평을 통해 브렌트 스파 시위도, 프랑스 핵실험 반대 시위도 엄청난 효과를 거둔 성공적 캠페인이었다며, “스파 잔존 오염물질 양의 과다는 그들 활동의 핵심 근거도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Review’는 환경 위기의 절박성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그린피스가 정부ㆍ기업과 유화적 해법(Sweet Talk)으로 줄타기하면서 그들이 수용하는 보잘것없는 개선을 추구하는 것은 실망스럽다고 꼬집었다. 당시 그린피스는 프랑스 여론을 의식해 유럽 시민들의 프랑스 제품 불매운동에 동조하지 않았고, 영국 보수당의 핵발전소 민영화에도 정부의 핵 안전 검사가 보다 엄격해질 것이라며 동조했다.

캐슬은 그린피스가 언론 눈치만 보면서 청년 활동가들의 창의적ㆍ자발적 동력은 경시한다고 비판했고, “(기업주의를 비판하며) 처음 우리가 추구하던 바와 완전히 반대로 가고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방이 아닌 전혀 차별적인 모델을 추구해야 한다”고도 했고, “돈과 이미지에 너무 신경을 쓴다”(guardian)고도 했고, “과도한 권력집중과 조직의 분절화”를 못마땅해 하기도 했다. 그는 조직의 활력을 되살리는 길은 “구성원들의 명예와 용기, 창의적 날카로움을 복원하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린피스를 떠난 캐슬은 얼마간 상선회사에서 일했고, 2000년대 초 다시 복귀해 5년 남짓 연안 불법어로 감시활동에 몰두했다. 2000년대 중반 은퇴한 그는 고향 건지 섬을 마주보는 영국 최남단 펜전스(Penzance) 항에 ‘스노우 구스(Snow Goose)’라는 이름의 낡은 소형 요트를 정박해두고 거기서 생활했다. 그는 82년 결혼해 1남1녀를 낳고 88년 이혼한 뒤 전처와 친구처럼 지냈다고 한다.

존 캐슬의 부고가 전해지자 레인보우 워리어 등 세 척의 그린피스 선박은 일제히 조기를 게양했다. 그건 '지침'이 아니라 활동가들의 마음이 시킨 일이었을 것이다. 96년 '시리우스' 조타실의 그. 그린피스
존 캐슬의 부고가 전해지자 레인보우 워리어 등 세 척의 그린피스 선박은 일제히 조기를 게양했다. 그건 '지침'이 아니라 활동가들의 마음이 시킨 일이었을 것이다. 96년 '시리우스' 조타실의 그. 그린피스

그는 2008년 3월 그린피스 선장 출신인 피트 부케(Pete Bouquet)와 단 둘이서 낡은 요트로 싱가포르에서 인도양 몰디브 남쪽 차고스(Chagos) 제도의 산호섬 디에고 가르시아까지 항해, 미 공군기지 건설로 고향에서 쫓겨난 섬 주민들의 분노를 대변하며, 영국 지역정부와 미 공군이 국제법 및 유엔헌장을 위반하고 있다고 항의했다. 그들은 얼마간 구금 당한 뒤 요트를 빼앗긴 채 추방됐다. 그는 “권력의 범죄를 막지는 못하더라도, 고통스럽더라도, 누군가는 그 범죄를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shetnews, 2018.1.20) 그 말은 71년 알래스카 미 핵실험 저지를 위해 소형 선박 ‘필리스 코맥(Phyllis Cormack)호를 타고 폭풍우 속에 출항했던 원년 멤버들의 다짐이자 전술 즉 ‘묵묵히 지켜보기 Bearing Witness’와 같은 거였다. 그리고 그가, 신자는 아니었지만, 청년시절부터 가슴에 품고 살았다는 퀘이커(Quaker)의 이상이기도 했다. 암 투병 중이던 2016년 독일의 난민구조 비정부기구 ‘SeaWatch’의 자원봉사자로, 지중해 난민 구조작업에 가담한 게 그의 마지막 활동이었다. 그는 “내게 환경주의는 그리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고 그러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선장이면서도 배식 땐 주걱을 들만큼 소탈했고, 과묵하면서도 유머러스했고, 채식주의자였고, 독서와 클래식 음악을 즐겨 럼주라도 몇 잔 마시면 예이츠의 시 ‘The Second Coming’ 쯤은 암송했고, 입ㆍ출항땐 의도적으로 여성 선원에게 헬름(Helm)을 맡겨 “여성이 배를 조종하는 게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해야 한다”(good-nonprofit.com)고 했다는 그를, 어떤 이들은 “다시 없을 레인보우 워리어”, 혹은 “그린피스의 화석 같은 존재“라며 존경한다. 어쩌면 그린피스의 안보다 바깥, 후원자와 자원봉사자들이 그를 더 기릴지 모른다.

그의 부고가 전해지자, 보는 이 없는 어느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을 그린피스 해양감시선 아크틱 선라이즈 호와 에스페란자 호, 레인보우 워리어 호는 그린피스의 깃발을 가만히 내려 달았다고 한다.(greenpeace.org)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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