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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핼러윈, 천국이 보내온

입력
2017.11.03 14:1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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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알려지지 않은 성인들을 위한 축일인 ‘올 핼러 데이’의 전날 밤에는, 세상을 잭 오 랜턴과 마녀, 귀신과 최순실에 이르는 수많은 기괴한 존재들이 뒤덮는 순간이 온다. 사람들은 이때를 대비해 스스로를 그런 기괴한 것들인 양 꾸민 채 파티를 열어 그들이 침입하는 것을 막는다. 그날을 일컬어 ‘핼러윈’이라 부른다.

웬 뜻도 근본도 없는 서양 명절이 들어와 미풍양속을 어지럽히느냐며 학을 떼는 사람들도 있지만, 핼러윈은 원래 그런 날이다. 성인들을 기념하는 날 귀신들이 속세에 올라온다는 유래부터가 이상하기 짝이 없는데, 기독교의 축일에 켈트족의 축제가 결합하다 보니 그리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아일랜드의 호박 유령 잭 오 랜턴이 덧붙었고, 죽은 자들을 기리는 남미의 문화가 융화되었다. 실로 세계 문화의 잡탕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틀도 격도 없이 즐겁다. 이태원 일대는 가장 대표적인 세계 문화의 수입처다. 핼러윈을 즐기기에도 이만한 곳이 없다. 핼러윈을 사흘 앞둔 지난 토요일 밤, 이태원은 이미 역사 내부에서부터 인파로 꽉 차 있었다. 유명 영화 캐릭터부터 온갖 기이한 분장들이 넘실댔고, 그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또 그득했다. 나는 시끄러운 클럽 음악에 작은 스테이지를 겸한 칵테일 바에서 오천 원짜리 칵테일을 마시다가, 말도 안 통하는 옆 테이블의 흑인 손님들과 의기투합해 주정이나 다름없는 춤판을 벌였다.

뉴스는 핼러윈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상업적이다’. ‘생산적이지 못하고 소모적이다’. ‘자극적인 분장이나 파티로만 핼러윈이 확산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늘 그랬다. 뉴스는 밸런타인데이니 크리스마스니 하는 날들이 상업적이고 소비적이라며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고들 했다. 핼러윈 또한 그 상투적인 조리돌림의 표적에 합류했다.

물론 차별과 갈등을 조장하는 허례허식으로 빠질 위험은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상업적이고 소모적이란 비판을 따지자면 설이나 추석은 어떤가? 초콜릿은 상업적이고 송편은 그렇지 않은 것일까? 돈 수십만 원이 우습게 깨지는 차례상은 어떨까? 조상을 기리는 것과 어찌 비교하느냐는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르지만, 그리 따진다면 연인 사이에 마음을 나누는 것이 그보다 못하리란 법은 또 어디 있을까?

사실 축제의 뜻이니 근본이니 따지는 것도 우스꽝스럽다. 민족 고유의 명절이라는 설과 추석은 여전히 가부장제의 유산이다. 풍속이 많이 변했다지만 결국 시댁에서 차례를 지내고 친정으로 출발하는 시댁 중심의 스케줄이 당연시되며, 차례를 준비하는 것은 대부분 여성들이지만 모시는 조상은 부계 중심이다. 개인적인 사정은 물론 종교나 신념의 문제로도 빠지기가 어렵다.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면 된다는 말조차 무색하게도 그 안에 이미 갈등의 여지가 한 가득 내재되어 있는 셈이다. 뜻이니 근본이니 하는 공허한 가치에 얽매여 도그마가 되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축제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

나는 핼러윈에 여성만 일하고 남성은 생색만 낸다거나, 윗세대는 강요하고 아랫세대는 거부한다거나 하여 물의를 일으켰다는 얘기를 들어본 일이 없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고 누구도 부담을 주지 않는다. 인종, 성별, 성적 지향에 이르기까지 개개인의 모든 개성을 아우른다. 싸구려 칵테일 한 잔만으로 동참할 수 있고, 그 취기와 객기만으로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 땅을 ‘헬조선’으로 만드는 건 설과 추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핼러윈이 모자라서다. 거기 무슨 의미가 있는지 따질 까닭도 없다. 야근과 박봉에 치이다 좁고 시끄러운 방에 겨우 몸을 누이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웃고 즐길 수 있는 하룻밤 축제일 따름이다. 그러니, 이 온갖 기괴한 것들에 경배를, 우리가 만드는 난장판에 경배를. 모르잖는가, 그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 줄지.

임예인 슬로우뉴스, ㅍㅍㅅㅅ 편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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