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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명성도 상속이 되나요?

입력
2017.08.1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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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최민수의 아들 최유성은 tvN 예능프로그램 '둥지탈출'에 출연하고 있다. tvN 방송화면 캡처
배우 최민수의 아들 최유성은 tvN 예능프로그램 '둥지탈출'에 출연하고 있다. tvN 방송화면 캡처

2006년 한 젊은 배우를 인터뷰했다. 추석 대목을 앞두고 나온 한 영화에서 연기를 향한 그의 강한 열정이 느껴져서였다. 그는 대중의 눈에는 낯선 배우였으나 충무로에선 될성부른 떡잎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가 나온 저예산독립영화가 그 해 칸국제영화제에 진출해 눈길을 모을 때였다. 그의 아버지가 유명 배우라는 점도 영화인들 사이에선 화제였다.

그는 인터뷰가 끝난 뒤 예상 밖 부탁 하나를 조심스레 했다. “OOO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빼주시면 안 되나요?” 오로지 자신의 연기만으로 인정 받고 싶고, 혹시라도 아버지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그는 아버지 성이 담기지 않은 예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프로필 사진을 찍고선 연예기획사와 영화사에 자신의 이력서를 돌린 뒤 데뷔를 하게 된 사연도 그는 들려줬다.

요즘 방송은 10여 년 전 한 배우와의 만남을 떠올리게 된다. 누구누구의 아들과 딸들이 연예인 아버지 또는 어머니 손을 잡고 여러 예능프로그램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어서다. 어린 아이가 연예인 부모와 보내는 일상을 포착한 프로그램과 달리 강한 반감이 인다. 성장한 자녀 대부분은 연예인을 꿈꾼다. 연예인 부모의 인기에 기대 방송에 출연하고, 자신의 얼굴을 쉬 알리는 듯해 마음이 불편하다. 한 여자 의사는 단지 유명 연예인의 아내라는 이유로 지상파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가 왜 프로그램에 등장하는지, 시청자들이 그의 일상을 왜 보고 있어야 하는지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유명도가 돈이 되고, 유명인의 가족까지도 유명인 취급을 받는 세상이라지만 불편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고위 관리의 자제를 과거를 통하지 않고 채용했던 고려 조선시대의 음서제도까지 떠오른다.

화면 밖 현실도 예능프로그램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의 명성이나 위세를 발판 삼아 사회적 성취를 이루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몇 년 전 유행어로 자리잡은 ‘엄친딸’(엄마 친구 딸)과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는 부모 덕, 가족 덕을 보려는 사람들의 저열한 욕망과 별 볼일 없는 집안 출신이라 생각하는 이들의 열패감을 동시에 대변한다. 애초 공부 잘하고, 외모도 뛰어나서 비교 대상으로 소환되는 엄마 친구의 자녀라는 뜻으로 통용되던 엄친딸과 엄친아는 어느새 재력이 있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부모를 둔 사람들로 의미를 확장했다. 근사한 외모에 남부러워 할 학력을 지녔는데, 유력한 집안 출신이라면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으로 인식된다.

예전엔 누군가의 아들 딸이라는 말은 최대한 감추고, 자신의 실력이 부모의 빛에 가릴까 봐 노심초사했다면 엄친딸, 엄친아를 주요 자산 중 하나로 여기고 뽐내는 게 요즘 세태다. 지난해 사회를 분노로 들끓게 했던 정유라의 언급을 변용해 이렇게 속으로 외치는 이들이 많을 듯하다. “배경도 실력이야, 부모를 원망해.”

경쟁이라는 건조한 단어를 쓰기에도 민망하게 살벌한 입시와 입사 전쟁을 치러야 하는 사회이니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 보다 하나라도 나은 게 부모라면, 모든 면에서 우열을 가리기 힘든데, 그나마 차이를 둘 수 있는 게 집안이라면 애써 드러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 테니까. 하지만 재산처럼 부모의 인기나 명성, 배경이 ‘상속’되는 사회는 분명 건전치 않다. 재산은 상속세를 통해 그나마 사회에 일부라도 환원되지 않는가.

앞에서 언급한, 연예인 아버지를 둔 배우는 그 후 어떻게 됐을까. 영화 ‘추격자’로 대중의 눈길까지 잡았고, 이후 충무로의 간판으로 성장했다. ‘국가대표’와 ‘암살’ ‘아가씨’ ‘터널’ 등 완성도 높은 흥행 영화의 출연자 명단 윗자리에는 그의 이름 하정우가 들어있다. 그가 아버지 김용건의 지명도를 적극 활용해 인기를 얻었다면 지금처럼 우리가 그에게 마냥 갈채를 보낼 수 있었을까.

라제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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