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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삶이 있는 풍경] 개와 돼지를 위한 변명

입력
2016.07.19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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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까 말까 다소 조심스러워 잠시 망설였다. 아직도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중인 데다 사방 글깨나 쓰는 이들의 따끔한 질책까지 봇물 터지듯 흘러넘치는 상황에서 나까지 거들고 나설 일은 아니려니 했다. 먼저 이 글이 ‘그분’을 향한 꾸지람이 아님을 미리 밝힌다. 몇 평생에 걸쳐 먹을 욕을 이번에 다 드셨을 텐데 거기에 무게를 더 얹어 줄 만큼 모질지는 않거니와, 굳이 한 개인을 향해 언성을 높일 생각은 애초부터 없다. 짐작하다시피 그분은 ‘개 또는 돼지’인 우리를 발판 삼아 상위 1%로 도약하시려 했던 바로 ‘그분’이다.

최근 들어 이처럼 일반 대중의 공분을 산 일이 있었을까. 스스로 ‘서민’이라 여기며 버거운 세상살이를 겪어내던 모든 이들은 그의 발언에 어이없이 속을 끓었다. 영화가 아닌 실제상황 속에서, 그것도 정부 고위 공직자의 입을 통해 한순간에 개와 돼지로 전락했으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문제적 상황이 잠시나마 통일된 민족의 저력을 보여주기는 했다. 아래위는 물론 동서 좌우로 두루 갈리고 구분된 채 편 가르기에 급급한 이 나라의 의식풍토와는 달리 온 지역과 지위 가림 없이 모두가 같은 목소리를 냈으니 말이다.

본격적인 찜통더위에 들볶이기도 전에 전례 없는 이열치열의 참맛을 보긴 했지만, 허망하게 훼손된 자기 정체성에서 비롯된 절망감이 그 실체적 원인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만하다. 타인에 의해 업신여김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는 등의 자기 존재를 부정당할 때 심각한 불쾌감이 드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감정이고 우리는 그것을 모멸감이라 부른다. 당연히 어느 누구도 모멸감에 빠질 상황을 손들어 반기지 않는다. 유난히 살기 어렵다는 하소연이 많은 요즘, 가슴 밑바닥에 위태롭게 깔려있던 자기 존엄의 불씨를 온통 깔아뭉갠(본인의 의지는 그게 아니었다고 하나) 그분의 발언은 분명 대중의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억울하고 속이 뒤집힐 이들은 정작 개와 돼지들이다. 도대체 개와 돼지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토록 푸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영특함이 뛰어나 ‘우매한’ 국민을 대신해 나랏일의 중책을 맡았던 그분이 같은 동물인 인간과 개, 돼지가 오래도록 서로를 ‘탐’해 왔음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어쩌다가 그런 망발을 하고 말았을까. 정녕 그분은 개와 돼지를 탐한 적이 없다는 말인가. 사람에게 치여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가는 이들 곁에서 살과 가슴을 나누며 반려의 깊은 맛을 느끼게 해준 주변의 수많은 견공이 떠올라 너무 미안할 지경이다.

꽤 오래전 바다 건너 낯선 곳의 시골 마을에서 마주한 돼지가족에 대한 추억은 지금도 ‘꿀꿀한’ 마음을 달래주는 청량제다. 꿀꿀 꽥꽥거리는 소리에 끌려 허름한 돼지우리 안을 들여다본 나는 열 마리는 족히 되는 어린 새끼들이 어미젖을 빨기 위해 서로 몸싸움을 하며 뒹구는 모습과 떡하니 마주했다. 귀찮거나 체념한 듯 오후의 햇살을 즐기며 누워있는 어미돼지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며 흐뭇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비약하자면 같은 우리인 ‘서민’들을 자신과 분리해 하물며 개와 돼지라고 비유할 일이 결코 아니지 않나.

카메라 플래시 세례 속에 땀을 뻘뻘 흘리며 술 탓이라 자신을 변명하는 그분이 무척 안쓰러웠다. 불과 며칠 전까지 누구에게나 당당했을 금테 안경 속 그의 자존감은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약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리라. 다만 그 강함의 척도와 기준을 그가 그토록 벗어나려고 했던 이 사회의 서민인 보통 사람들에게 두지 못한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그분이 더 이상 무너지지는 않기를 바란다. 서민들이 낸 세금으로 승승장구했고 서민의 삶을 헤아리지 못해 받게 된 질타를 잘 견뎌 본래의 성숙했을 삶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한다. 권력과 자본을 앞세운 욕망의 물꼬 아래 이전투구를 벌이는 일부 높은 자리의 인간 군상들과는 달리 개와 돼지는 절대 배신을 하지는 않는다. 개와 돼지여도 괜찮은 삶인 것이다. 그분이 다시 서민들 곁으로 돌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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