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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은 당신의 옷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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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은 당신의 옷보다 아름답다

입력
2016.08.1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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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백’과 ‘먹방’의 시대를 거쳐 집 꾸미기가 트렌드의 화두가 됐다. 한 때의 호사가 아닌 항시적 쾌락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인테리어는 ‘가성비’ 최고의 오락이다. H&M 홈 제공
‘잇백’과 ‘먹방’의 시대를 거쳐 집 꾸미기가 트렌드의 화두가 됐다. 한 때의 호사가 아닌 항시적 쾌락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인테리어는 ‘가성비’ 최고의 오락이다. H&M 홈 제공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잇백’을 찾아 헤맸다. 수백 만원에 달하는 ‘그 가방’ 하나를 손에 쥐는 순간, 삶의 품격은 저절로 제고될 것 같은 판타지를 그것들은 선사했다. ‘럭셔리 열풍’으로 온 사회가 들썩였다. 그러다 동시에 깨달은 걸까. 아무리 근사하고 값비싼 가방이라고 해도 상품 하나로 우리의 삶이 달라지는 일은 없다는 것을.

‘잇백’으로 상징되던 럭셔리 패션에 대한 관심이 음식을 거쳐 집 꾸미기로 급격히 이동 중이라는 게 수시로 체감되는 시절이다. ‘이 브랜드에서도 리빙 제품이?’ 싶게 패션 브랜드들의 토털리빙화가 뚜렷하다. 날마다 자고 먹고 쉬는 공간의 스타일리시한 갱신이야말로 상품이 아닌 경험을 산다는 최근의 소비철학에 부합하는 것. 1년 365일 온 몸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공간-그 아무리 좁고 계약 만기면 이사가 불가피해도-을 안락하고 쾌적하며 멋지게 꾸민다는 것은 시대정신이 된 ‘가성비’의 측면에서도 잇백과 맛집의 쾌락을 압도한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의-식-주라는 문화 발달의 수순을 정석으로 밟고 있는 중이다.

패션브랜드에서 리빙브랜드로 확장한 마틴싯봉의 홈카페 컬렉션. 마틴싯봉리빙 제공
패션브랜드에서 리빙브랜드로 확장한 마틴싯봉의 홈카페 컬렉션. 마틴싯봉리빙 제공

옷보다 집, 가방보다 그릇

시장조사 전문기업 마크로밀엠브레인이 지난해 말 실시한 홈인테리어 실태 조사 보고서를 보면, 집 꾸미기를 나만의 개성 표출로 느끼는 세간의 인식변화가 명확히 드러난다. 19~59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조사 대상자의 87.8%(복수 응답)가 ‘홈인테리어는 나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향후 셀프 홈인테리어 의향이 있다’는 응답도 71.4%를 차지했다.

집밥, 집술, 홈파티, 홈트레이닝, 홈바캉스(스테이케이션) 등 가능한 모든 활동을 집에서 해결하려는 최근의 추세는 경제·사회적 불안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응답자의 81.9%가 ‘집에 가만히 있을 때 가장 마음이 편하다’고 답했으며, ‘사회적 불안감의 고조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고 응답한 사람이 56.9%나 됐다. 경제불황으로 가용한 재정적 자원이 축소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에 따른 심리적 위축도 ‘집 안에서의 힐링’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집이 말 그대로 메가 트렌드가 된 이유다.

소품으로 집안 분위기를 바꾸는 데 쿠션만한 것도 없다. H&M 홈 제공
소품으로 집안 분위기를 바꾸는 데 쿠션만한 것도 없다. H&M 홈 제공

고로 사람들이 사려는 것은 수십 년 전 일찌감치 홈 컬렉션을 선보인 에르메스의 그릇이나 침구 같은 것이 아니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사람들에게나 해당했던 인테리어가 전·월세와 원룸을 막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만큼 저렴하지만 세련되고, 트렌디한 제품들이다. 2014년 말 국내 상륙한 이케아발(發) 지각변동과 거의 동시에 이뤄진 H&M과 자라의 홈 컬렉션 런칭은 패스트 패션에 이은 패스트 리빙으로 이 수요를 예리하게 포착했다. 이에 질세라 한샘, 현대리바트, 까사미아, 체리쉬 등 가구업체들이 잇따라 대형 플래그십 스토어를 선보였으며, 이마트도 지난해 일산에 이마트타운을 열면서 가구와 침구, 테이블웨어 등 인테리어·생활용품을 판매하는 ‘더라이프’를 런칭했다. 생활용품 비중을 강화한 이랜드 ‘모던하우스’, 신세계인터내셔널 ‘자주’, 롯데상사의 ‘무인양품’까지 ‘라이프스타일 대전’이라 해도 좋을 각축전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이딸라X이세이 미야케’ 홈컬렉션 쿠션커버 에메랄드와 핑크. 블로거 차정주씨 제공
‘이딸라X이세이 미야케’ 홈컬렉션 쿠션커버 에메랄드와 핑크. 블로거 차정주씨 제공

라이프스타일의 패션화

최근에는 기능성 침구 전문 브랜드 웰크론이 가구, 향초, 테이블웨어 등 다양한 리빙 상품으로 제품군을 확장, 서울 구로구에 모던&미니멀 콘셉트의 대형 플래그십스토어 ‘세사에디션’를 오픈했다. 1층에는 숍인숍 형태로 생활가구, 가정생활용품, 인테리어 소품 등을 판매하며, 2층에는 키즈테마존으로 아동 기능성 침구 ‘키즈세사’와 친환경 원목의자, 시계, 아동식기, 옷걸이 등 아동 인테리어 및 생활용품을 팔고 있다.

올 6월 문을 연 세사에디션 플래그십스토어. 세사에디션 제공
올 6월 문을 연 세사에디션 플래그십스토어. 세사에디션 제공

웰크론 홍보팀의 이창길 과장은 “디자인과 트렌드에 대한 소비자 관심과 욕구가 증가하면서 라이프스타일의 패션화가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며 라이프스타일을 키워드로 강조했다. 이제 소비자들은 범주를 가리지 않고 작은 소품 하나도 자신의 공간에 가장 잘 어울리는 패셔너블한 상품을 선택하려 하고, 주력업종이 무엇이든 라이프스타일 전체를 아우르는 형태로 제시하지 않으면 소비자에게 어필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패션, 뷰티, 리빙뿐 아니라 서점, 갤러리, 카페까지 함께 운영하는 플래그십스토어로의 진화가 발 빠르게 이루어진 결과, 이케아와 H&M 홈과 교보문고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진 형국이다.

이딸라와 이세이 미야케가 협업한 홈컬렉션.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테이블매트, 냅킨, 오각접시. 이딸라 제공
이딸라와 이세이 미야케가 협업한 홈컬렉션.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테이블매트, 냅킨, 오각접시. 이딸라 제공

판매하려는 상품이 무엇이든 그들이 파는 것은 라이프스타일이어야 하므로 장르간 장벽 철폐 및 합종연횡은 자연스런 일이다. 핀란드 테이블웨어 브랜드 이딸라는 최근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와 협업해 홈 컬렉션 제품군을 선보였다. 4년여에 걸친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식기뿐 아니라 쿠션과 테이블매트, 냅킨, 에코백 등 패브릭 소품까지 확장한 리빙 제품 30종을 출시했다. 이딸라 마케팅팀 최예람 과장은 “라이프스타일 시장의 성장 및 집에 대한 인식 변화에 따라 저가 상품군에서 점차 질 높은 상품군으로의 소비 이동을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화이트와 베이지, 브라운의 컬러믹스로 내추럴하게 꾸민 마틴싯봉리빙의 오가닉 클래식 홈세트. 마틴싯봉리빙 제공
화이트와 베이지, 브라운의 컬러믹스로 내추럴하게 꾸민 마틴싯봉리빙의 오가닉 클래식 홈세트. 마틴싯봉리빙 제공

패션의 리빙화를 보여주는 최신의 사례로 프랑스 디자이너 브랜드 마틴싯봉이 있다. 짝을 바꿔가며 신는 3켤레 신발로 유명한 패션브랜드 블랙마틴싯봉이 국내기업 슈페리어에 인수된 후 지난해 말 선보인 테이블웨어 ‘마틴싯봉리빙’은 올 봄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 ‘눈에 띄는 제품상(The Best Product)’을 수상하며 ‘품절 소동’을 일으켰다. 패션과 리빙을 접목시켜 새롭고 창의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겠다는 포부로 런칭한 마틴싯봉리빙은 패션의 패턴을 그릇에 얹은 개성 있는 디자인으로 스타일리시한 일상을 위한 테이블웨어를 보여줬다. 이어 가을부터는 침구류까지 제품군을 확장, 명실상부한 리빙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예정이다.

패션에서 테이블웨어로 확장한 마틴싯봉리빙이 곧 선보일 침구류와 인테리어 소품들. 마틴싯봉리빙 제공
패션에서 테이블웨어로 확장한 마틴싯봉리빙이 곧 선보일 침구류와 인테리어 소품들. 마틴싯봉리빙 제공

집은 누군가에게 과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즐기기 위해서 꾸민다. 물론 삶의 화보화를 부추기는 인스타그램과 블로그가 확장된 신체기관으로 작동하고 있는 시대인 만큼 ‘온라인 집들이‘ 같은 것을 하기는 한다. 주거불안이 야기한 새로운 형태의 인테리어는 대대적인 시공이 주를 이루는 ‘대문자 인테리어’ 대신 침구와 소품 등으로 꾸미는 ‘소문자 인테리어’다.

H&M 홈의 도기 화병(왼쪽)과 책 모양의 수납 박스. H&M 홈 제공
H&M 홈의 도기 화병(왼쪽)과 책 모양의 수납 박스. H&M 홈 제공

인테리어가 신혼부부나 가정주부들만 관심을 갖는 분야라는 선입견을 철폐하며 2030 젊은이들, 특히 독거남성들이 셀프 인테리어의 스타로 부상하고 있다. 북유럽풍으로 꾸민 침실과 킨포크 스타일의 작은 원목 테이블, 영국식 애프터눈 티타임이 부럽지 않은 근사한 그릇에 소박한 집밥을 담아 먹는다. 작은 소파에는 심플하면서도 강렬한 패턴의 쿠션들이 지친 허리를 받쳐주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 차려입은 홈패션은 누가 찾아와도 부끄럽지 않다. 인스타그램이 없어도 포기할 수 없는, 이것이 ‘나’의 라이프스타일이다. 그러므로 ‘나’의 허름한 월세집은 당신의 럭셔리백보다 아름답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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