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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재 칼럼] 박근혜의 독백

입력
2016.12.0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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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시한폭탄 제거가 발등의 불이다.

‘4월 퇴진, 2선 후퇴’카드를 던져 시간을

버는 게 급선무다. 그래도 촛불이 두렵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일 대구 중구 서문시장을 방문해 화재 현장을 둘러보는 모습. 뉴스1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일 대구 중구 서문시장을 방문해 화재 현장을 둘러보는 모습. 뉴스1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임기를 끝까지 마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나도 접었다. 아버지 옆에서 오랫동안 권력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내게 그런 육감조차 없겠는가. 촛불의 함성이 매주 청와대 관저에 울려 퍼질 때 이미 권력이 스러졌음을 절감했다. 분노와 회한 등 온갖 상념이 떠오르지만 지금은 그런 한가한 감상에 젖어 있을 겨를이 없다. 째깍거리는 탄핵의 시한폭탄을 제거할 방도를 찾지 않으면 안될 만큼 절박한 상황이다.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그 순간부터 직무가 정지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 말마따나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진다. 그렇게 유폐 생활을 하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을 인용하면 바로 권좌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 다음 기다리는 건 검찰 소환과 사법처리다. ‘헌정 사상 처음 탄핵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가 평생 따라다니고 경호를 제외한 모든 혜택도 사라진다. 나를 지탱해줄 친박계는 ‘폐족’으로 전락해 정계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몇 날을 친박 중진과 머리를 맞댄 끝에 묘안을 찾아냈다. ‘임기 단축’을 배수진 삼은 3차 대국민담화다. 폭탄을 국회로 돌리자는 의도는 적중하는 듯했다. 야권부터 적전분열 양상을 보였다. 애초부터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물과 기름 같은 존재다. 하루라도 빨리 대권을 차지하려는 문재인과 반문 세력을 결집해 제3지대를 구축하려는 안철수가 언제까지 손을 맞잡기는 어렵다고 봤는데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결국 두 야당이 우왕좌왕하다 2일 탄핵안 처리가 무산됐다.

비박계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인간 박근혜를 싫어할지는 모르나 대권을 통째로 야당에 넘겨줄 수 없다는 데는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김무성이 누군가. 나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앞장섰고 얼마 전까지 나와 손발을 맞춰 가며 국정을 이끌어 왔던 그다. 이제 와서 “탄핵에 앞장서겠다”며 피해자 행세를 할 때부터 간파했다. 이 기회에 친박을 몰아내고 보수세력을 재편해 주도권을 쥐겠다는 게 그의 속셈 아닌가.

여기까지는 시나리오를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주 말 200여만명의 시민이 거리로 몰려나오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겁을 집어먹은 비박이 탄핵 표결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사실 시민들이 이토록 많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경찰 보고도 1주일 전보다는 인파가 적을 것이라고 전망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포기하기는 이르다. 국회 탄핵 표결까지 사흘의 시간이 있고, 카드도 아직 남아 있다. 내년 4월 말 퇴진을 국민에게 약속하는 것이다. 2선 후퇴 선언도 못할 이유가 없다. 아직 비박계에는 내가 퇴진 시점을 밝히면 탄핵 대신 자진 사퇴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표결을 강행하더라도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

어차피 2선 후퇴라는 게 법으로 정해진 바도 아니다. 기회를 봐서 인사권을 행사하거나 외교, 안보에서 권한을 가질 수 있다. 그 사이 북한이 돌발 행동이라도 하면 보수층을 중심으로 나를 불러내는 목소리가 커질 것이다. 지금은 어쨌든 시간을 벌지 않으면 안 된다. 탄핵을 불발시키면 내년 4월까지 시간을 벌면서 탄핵 정국을 단숨에 개헌 정국으로 바꿀 수 있다. 개헌을 매개로 판을 다시 짜면 새누리당도 대선에서 공간을 확보할 여지가 있다. 내년 1월 귀국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보수진영의 대선주자로 나설 경우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걱정되는 건 오직 촛불 민심이다. ‘4월 퇴진과 2선 후퇴’를 밝혔는데도 쇼라며 비박계를 몰아붙이면 정말 대책이 없다. 탄핵이 내 희망대로 부결되더라도 성난 시위대가 청와대와 새누리당으로 몰려오면 감당 못할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두렵다. 지금 국민은 예전의 온순했던 그 사람들이 아니다. 내 손 한 번 잡고, 내 얼굴 한 번 보려고 열광하던 그들이 아니다. 국민이 이렇게 무서운 존재인 줄 미처 몰랐다. 불면의 밤이 오늘도 이어진다.

*현재 정국 상황을 토대로 박근혜 대통령의 심경을 추정해 쓴 글입니다.

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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