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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360˚] “죽기 전 일본 사과 받겠다”던 소원, 유언으로 남았다

입력
2017.04.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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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제 1277차 정기 수요시위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4일 별세한 이순덕 할머니의 영정을 바라보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지난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제 1277차 정기 수요시위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4일 별세한 이순덕 할머니의 영정을 바라보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그날은 고 이순덕 할머니가 참석한 마지막 수요시위였다. 비바람이 불어 한낮에도 어두웠던 5일, 어김없이 열린 제1277차 수요시위에 함께 한 사진 속 할머니는 더없이 인자한 미소로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단 학생들을 바라봤다. 건강악화로 2014년부터 요양병원에 지내왔던 터여서, 한동안 수요시위에 나오지 못했던 고인이었다. 묵념하는 학생들을 지켜보던 이용수(89) 할머니는 감정이 북받쳐 이순덕 할머니의 영정을 어루만지며 흐느꼈다. 한국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는 “이순덕 할머니는 ‘내가 죽거든 너무 슬퍼하지 말고 함께 모여서 내가 차려준 밥을 먹고 즐겁게 웃었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겼다”며 “할머니 말씀을 따라 위안부 문제 해결에 함께 나서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최고령이었던 이순덕 할머니가 4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99세. 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생존자는 38명만이 남았다.

열 아홉에 빼앗긴 삶

1918년 전북 김제 출생으로,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이순덕 할머니의 삶은 고단했다. 단칸방 초가집에서 네 식구가 함께 지냈고, 소작지 하나 없어 남의 집 삯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야 할 만큼 가난했다.

1937년 봄, 그날도 이 할머니는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혼자 논두렁에 나와 쑥을 캐고 있었다. 먹을 게 없어 보리밥에 쑥을 섞어 끼니를 때우던 시절이었다. 어디선가 30~40대로 보이는 조선 남자가 다가와 “배불리 먹고 좋은 신발도 주는 곳을 알려줄 테니 나만 따라오라”고 말했다. 된장국에 밥 한끼는 커녕 굶지 않으면 다행인 시절, 배불리 먹여주겠다는 말은 꿈 같은 말이었다.

남자를 따라가던 할머니는 부모님이 생각나 “집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오겠다”고 했다. 순식간에 사내의 태도가 돌변했다. 손을 잡아 끌고 뺨을 후려치며 강압적으로 그를 끌고 갔다. 그날 밤 이 할머니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인 15~19세 소녀들과 함께 행선지도 모르는 기차에 올랐다. 이후 중국의 한 일본군 주둔지에서 끔찍한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일본군의 범죄에 고통 받은 세월이 무려 9년이다. 당시 몸에 새겨진 칼자국은 나이가 들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또렷이 남았다

해방 후 겨우 고향을 찾아갔지만 이 할머니는 부모님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딸이 사라진 후 찾아 헤매다 모두 화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다. 할머니는 과거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과거를 숨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죄 없는 죄인’이었다. 두 차례 후처로 결혼을 했지만, 과거의 후유증 때문인지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두 번째 남편과 사별한 뒤 할머니는 자식도 없이 혈혈단신의 처지로 내몰렸다.

1991년 6월 태평양전쟁피해자유족회가 일본 야마구치현 지방재판소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뒤 나오고 있다(왼쪽). 소송 전 기자회견에서 한 위안부 피해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국일보자료사진
1991년 6월 태평양전쟁피해자유족회가 일본 야마구치현 지방재판소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뒤 나오고 있다(왼쪽). 소송 전 기자회견에서 한 위안부 피해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국일보자료사진

“내가 거지인 줄 아느냐”…단호히 소리친 ‘동백꽃 할머니’

이순덕 할머니는 일흔이 넘어서야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에 악몽 같은 과거를 신고했다. 이후 그는 군 위안부 피해자 3명ㆍ강제노동 피해자 7명과 함께 1991년 일본 야마구치(山口)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지부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재판이 진행되던 가운데 일본에선 정부 사과 대신 일종의 국민기금 형태로 위안부 문제를 마무리 짓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재판 참석차 일본을 방문한 이 할머니에게 일본 기자들이 이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했다고 한다. 이 할머니는 “내가 거지인 줄 아느냐, 일본정부가 정식으로 사죄하지 않는 이상, 나는 그런 식의 돈을 받을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결국 1998년 1심 재판부는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30만 엔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일본정부에 일제강점기의 범죄 책임을 묻는 첫 소송이자, 일본 사법부가 과거의 잘못을 일부나마 인정한 최초의 사례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거듭 상소했고, 이후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결국 기각 판결을 내린다.

이 할머니는 이후 서울 마포구에 있는 위안부 피해자 쉼터 ‘평화의우리집’에 머무르며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계속 싸워왔다. 2007년 일본의 아베 총리가 위안부 강제연행을 인정한 ‘고노담화(1993년)’를 부정하는 발언을 하자 며칠 뒤, 이 할머니는 90세의 나이로 직접 수요집회에 나와 찬바람을 맞으며 아베 총리를 규탄했다. 2015년 12월에는 한ㆍ일 위안부 합의를 맺은 한국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정신적ㆍ물질적 손해를 끼쳤다’면서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고령에도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 활발히 활동하던 이 할머니의 모습은 추운 겨울에도 지지 않는 고고한 동백과 같았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활동가들은 그를 ‘동백꽃 할머니’라 부른 이유였다.

“나 찾아 오시는 분들 모두 배불리 먹여주오”

지난 5일 고 이순덕 할머니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서대문구 연세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고인을 애도하는 추모객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미디어몽구 트위터
지난 5일 고 이순덕 할머니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서대문구 연세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고인을 애도하는 추모객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미디어몽구 트위터

서울 서대문구 연세세브란스병원에 차려진 이순덕 할머니의 빈소에는 4~5일 이틀간 약 1,400명의 조문객들이 찾아왔다. 그의 별세 소식을 들은 인근 대학 학생들과 시민들이 할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달려온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노란 나비모양 종이에 마음을 담아 할머니를 추모했다. 5일 빈소에 조문을 온 이화여대 재학생 박민지(23)씨는 “할머니가 장례식에 찾아온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갔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기셨다고 해서 눈물을 참으며 밥을 다 먹고 나왔다”고 말했다.

지난 10년간 별세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62명, 한해 6~7명의 할머니들이 세상을 뜬 셈이다. 생존자들의 평균 연령이 90세란 점을 감안하면, 이들이 언제까지 살아계시리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ㆍ일 위안부 합의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이 평행선을 달리는 사이, ‘일본의 진실된 사과’란 소원을 이루지 못한 동백꽃들은 하나 둘 스러지고 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순덕 할머니. 연합뉴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순덕 할머니.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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