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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한 시집만 200권... 이제 제 시집을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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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한 시집만 200권... 이제 제 시집을 냅니다"

입력
2017.11.0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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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규 시인은 “학생 시절 시와 소설에서 문체를 봤다면 편집자로 훈련을 받은 지금은 경제적인 문장인지 비문인지를 집중적으로 보게 된다”고 말했다. 그가 쓴 시도 매의 눈을 닮았다. 창비 제공
박신규 시인은 “학생 시절 시와 소설에서 문체를 봤다면 편집자로 훈련을 받은 지금은 경제적인 문장인지 비문인지를 집중적으로 보게 된다”고 말했다. 그가 쓴 시도 매의 눈을 닮았다. 창비 제공

“남의 시집만 200권 만들었는데 제 시집 내는 건 처음이네요.”

책 낸 소감을 묻자 뜬금없이 ‘팩트’를 말한다. 본인 말마따나 마흔다섯에 ‘첫’ 시집을 낸 박신규 창비 전문편집위원 얘기다. 고은의 시집 ‘만인보’부터 황석영의 장편소설 ‘바리데기’, 공지영 장편소설 ‘도가니’, 박민규의 장편소설 ‘핑퐁’ 등 수 많은 히트작을 책으로 만들어 출판계에서는 시인보다 편집자로 잘 알려졌다.

31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책을 많이 만들어서인지 내 시집을 받아보면서도 담담하다”면서도 “20대부터 지금까지 쓴 시가 다 담겼다”고 말했다. “시집에 넣을 시 고르고 순서 정하는 데에만 1년이 걸렸다”는, 공들인 시집 ‘그늘진 말들에 꽃이 핀다’ 앞날개에 박 시인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1972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시 쓰려고 문예창작과 갔었냐는 질문에 “중고등학생 때 백일장 대회에서 상 많이 받았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주변에서 ‘쟤는 시 쓰는 애’라고 불렸던 문학소년이었다는 말씀. “시집은 닥치는 대로 다 읽었다”는 그는 대학원을 졸업한 서른 되던 해 “예술을 몸(책)에 담는” 출판사에 입사하며 남의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책 만들 때는 적극적이었어요. 저자에게 ‘이 시에서 한 행을 빼자’거나 ‘소설 마지막 문단은 고민해보시라’고 제안했죠. 책 제목 짓는 건 비일비재하고요.” 그러는 틈틈이 시 구절이 떠오르면 메모 해두고, 시를 지으면 주변에 선보이기도 했다. 시를 눈여겨본 후배가 그 몰래 20편을 모아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공모전에 가명으로 투고했고, 등단 여부에 상관없이 창작기금 1,000만원을 주는 그 공모에 당선됐다. 출판사 창비에서 일한 지 딱 10년 되던 2010년, 경쟁사인 출판사 문학동네가 공모전 당선작을 보고 그에게 시를 청탁해 계간지 ‘문학동네’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기로 결정한 게 2015년, 20년간 써온 100여 편의 시 중에서 고르고 골라 60편을 담았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듯이” 이번 시집은 물론 후배 편집자가 만들었는데, 후배는 선배에게 배운 것처럼 ‘적극적으로 의견’을 주었고, 박 시인은 편집자 의견을 반영해 어떤 시는 아예 한 구절을 바꾸기도 했다.

‘바람이 불었다, 한겨울/ 철물점 천막처럼 반쯤 몸을 벗은 채/ 차갑게 울었다, 죽을 것처럼/ 상처를 주고받아도/ 우리는 미치지 않았고 사는 것처럼/ 살아남지도 못했다, 자고 나면/ 스무살 앳된 죽음마저도/ 함부로 버림받았다(후략)’ (‘화양연화’)

20대에 쓴 구절을 바탕으로 쓴 이 시를 비롯해 ‘모래알 동기들’, ‘꽃가루주의보’ 등 시편에는 ‘20대 박신규’의 감성이 듬뿍 담겨있다. “야근을 멈출 수 없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봄밤, 우주의 저편’, “책상이 빨갛게” 물들도록 원고를 수정하는 풍경을 그린 ‘노동시 혹은 에디터십’ 등 편집자 생활도 펼쳐진다. 옛 시인의 책에서 누락된 시를 발견했다는 독자의 연락을 받고 “취해서만 호기롭던 청춘”을 회상하는 시 ‘관식이처럼 마주 앉아서’는 이 시집의 절창이다.

‘배꽃 피면서 벚꽃 무너지는 자리에/ 주저앉자던 약속은 또 기억하는가/ 소심하고 걱정 많은 눈망울로 남은 벗이여/ 자꾸 없는 듯 희미하게 있지만 말고/ 관식이처럼 마주 앉아 딱 한잔만 받아주거라/ 서른몇살 ’피투성이 낙화‘로 갔을지라도/ 흔들리는 이 봄밤의 꽃잎처럼 잠시만/ 제발 잠시만 앉았다가 가거라’(‘관식이처럼 마주 앉아서’)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건 삶과 죽음이다. 삶의 절정과 죽음을 은유하는 ‘꽃’과 ‘그늘’을 제목에 담은 한 이유다. 박 시인은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를 구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돌고 돌아 시집을 내게 될 줄 알았을까. 그는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스스로 엄선한 시집 한 권은 낼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문청시절부터 20여년 간 쓴 시를 갈무리한 책 끝에 그는 이렇게 썼다. ‘마음을 다해 지은 집이라고/ 편하리라는 법이 있겠는가(...) 나를 온/ 나를 비껴간/ 나를 관통하고 내다버린/ 그리운 나들 앞에 엎드린다’ (시인의 말)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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