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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위해 피폭 사실 숨기는 일본인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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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위해 피폭 사실 숨기는 일본인 많아

입력
2015.09.09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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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차별 두려워 평생 말 안 해

70만명 집계보다 피해 더 클 것

日, 유전 증거 없다며 2, 3세 외면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원폭 피해를 입은 원정부씨. 평화박물관 제공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원폭 피해를 입은 원정부씨. 평화박물관 제공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를 입고 귀국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피폭2세 한정순씨. 이들은 “한국에도 원폭피해자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평화박물관 제공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를 입고 귀국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피폭2세 한정순씨. 이들은 “한국에도 원폭피해자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평화박물관 제공

“핵무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히로시마의 비극은 끝나지 않습니다.”

나가하라 도미아키(69) 일본 히로시마현 피폭 2ㆍ3세의 모임 이사는 8일 저녁 서울 견지동의 미술전시장 스페이스99에서 열린 ‘서울에서 만난 한일 원폭 피해자들’ 좌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좌담에는 나가하라 이사 외에 일본인 피폭 2세인 오나카 신이치(65), 한국의 원폭피해자거나 가족인 원정부(77) 김봉대(79) 한정순(56)씨가 함께했다. 원폭 70주년을 맞아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가 지난달 9일부터 열고 있는 기획전 ‘뜨거운 구름ㆍ이야기’ 관련 행사였다.

한국은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원폭 피해자가 많은 나라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으로 약 70만명이 피해를 봤고 그 중 한국인은 10%인 7만명으로 추정된다. 사망자를 빼면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피해자는 2,600여명.

원정부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서울지부장은 원폭으로 어머니와 동생을 잃었다. 그는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야 내가 원폭피해자라는 걸 알았다”면서 “그 후 친구도 모두 잃을 만큼 원폭 피해자의 인권과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 지부장은 “딸이 3년 전 백혈병 판정을 받고 지난해 다시 암 선고를 받아 수술 후 요양 중”이라며 “2세들이라도 방사능 피해가 없었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한국과 일본의 원폭 피해자는 집계된 수치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피폭 1세에 자각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도 있고, 사회적 차별을 두려워해 평생 숨기고 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나가하라 이사는 “아버지가 히로시마 원폭 지역 복구작업에 참여했는데 살아 생전 한번도 원폭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며 “일본에서도 자식을 위해 원폭 피해 사실을 숨기고 사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원폭 피해자 2, 3세가 겪는 상황은 일본에서도 심각하다. 일본 정부가 과학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원폭 피해의 유전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피폭 1세만을 지원할 뿐 피폭 2, 3세의 질병은 외면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광복 70년이 되도록 아직까지 피폭 1세 지원 대책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않고 있다.

히로시마에서 부모가 피폭 당한 한정순 한국인원폭2세환우회 명예회장은 15세 때부터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으로 네 차례 수술을 받았다. 피폭 1세인 어머니는 치료비 일부를 지원 받고 있지만 그에게는 전혀 지원이 없다. 한 회장은 “원폭 피해자로 평생을 고통 받았고 자식까지 그 고통을 받고 있다”며 “일본 정부는 원폭 피해가 유전된다는 과학적 증거가 없다면서 피폭 2, 3세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오나카 히로시마현 원폭피해자단체협의회 사무차장은 “일본 정부가 방사능 피해의 유전을 인정하지 않는 건 의료비 예산 확대를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정작 원자폭탄을 투하한 미국은 피폭 보상의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패전국인 일본이 미국과 전후 처리를 하면서 손해배상청구권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 협상에 참여하지 못한 한국과 중국은 손해배상 청구의 권리조차 봉쇄당했다.

한일 원폭피해자들은 이날 입을 모아 원폭 피해 문제가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사고 피해가 이어지고 있으며,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원자력발전소가 많은 한국(23기)도 방사능 피해 위험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핵무기는 점점 늘고 있다. 오나카 사무차장은 “핵무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도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며 “전쟁의 불씨인 핵무기를 없애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나가하라 이사는 “생존 피폭 1세의 평균 연령이 80세에 이르러 직접 증언해줄 분들이 많지 않다”며 “원폭 피해자 실상을 후대에 전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이들은 이날 낮 여의도 국회 앞에서 ‘원폭피해자 및 자녀를 위한 특별법 추진 연대회의’ 회원 150여명과 기자회견을 갖고 국내 원폭 피해자 및 후손들의 진료와 생활비 등 지원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이날 일본에 살고 있지 않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게도 일본 정부가 의료비 전액을 지급해야 한다는 첫 확정 판결을 내렸다.

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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