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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나도 가해자의 부모가 될 수 있다

입력
2017.08.3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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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세상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모든 부모는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되지 않길 기도한다. 하지만 가해자 되지 않기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피해자란 어떻게 막아도 발생할 수밖에 없다. 게티이미지뱅크
험한 세상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모든 부모는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되지 않길 기도한다. 하지만 가해자 되지 않기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피해자란 어떻게 막아도 발생할 수밖에 없다. 게티이미지뱅크

얼마 전 집안에서 한바탕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합산연령 17세의 오누이가 한편으로 똘똘 뭉쳐 컴퓨터에 새 유료게임을 깔아달라는 조직적 시위에 들어간 것이다. 어떤 게임인지 살펴본 후 결정하기로 하고 온 가족이 컴퓨터 앞에 모였는데, 트레일러 영상으로 본 게임의 세계관이 경악스러웠다. 알록달록 귀엽게 생긴 캐릭터들이 지하철 선로와 트럭 위, 사다리 등에서 서로를 밀어 떨어트리는 게임이었다. 요새 아이들 사이에서 아주 핫한 게임이라고.

“지하철에서 왜 친구를 밀어?” “그냥 게임이야.” “게임은 즐겁자고 하는 건데, 저게 왜 즐거워? 저건 범죄야.” “엄마, 나도 진짜랑 게임은 구분할 줄 알거든?” 어쭈, 좀 컸다? 하지만 느네 엄마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실제 저런 범죄 사건이 많았어. 그런데 그걸 게임으로 히히덕거리며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이번엔 일곱 살짜리 둘째가 “캐릭터가 너무 귀엽다”며 미학적 견지에서 고집을 부린다. 아, 피곤하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마’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야 민주적 엄마.

“얘들아. 잘 들어라. 즐거움엔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트럭 위에서 친구를 미는 건 장난이 될 수 없다. 실제가 아니라 해도 문제다. 지금 대한민국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가 나만 혼자 살겠다고 남을 밀어버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건데, 이 반사회적 세계관을 나날의 감각적 쾌락으로 향유하겠다니, 그건 반대다. 친구가 아니라 누구라도 떨어질 것 같은 사람이 있으면 손을 잡아줘야 하는 거 아니냐?” 한 마디로 이 게임은 헬조선의 메타포라는 요지의 설명을 10세 미만의 어린이 언어로 번역하자니 당 수치가 뚝 떨어지는 게 느껴지며, 게임 개발자를 원망하는 마음이 불끈 솟았다. “옳은 방식으로 즐거운 다른 게임을 찾아와. 그러면 깔아줄게.” 뾰로통하던 아이들은 이내 새 게임을 찾아왔고, 새 게임의 합당한 즐거움 속에서 이전 게임은 잊어버렸다.

‘막으면 숨긴다.’ 아이들을 키우며 육아의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명제다. 게임이 너무 하고 싶은데 못하게 하면? 몰래 한다. 유튜브에 꼭 보고 싶은 동영상이 있는데 못 보게 하면? 몰래 본다. 원천 봉쇄해 봐야 그저 자식과 멀어질 뿐이다.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어서 욕망 자체를 근절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건강한 욕망을 갖고 적절한 선에서 제어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부모의 역할이란 옳은 것을 욕망하도록 훈련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는 것.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함께할 수는 없으므로, 육아의 최종 목표는 결국 신독(愼獨)일 수밖에 없다.

586 진보 부모 밑에 20대 극우 자식 나오고, 페미니스트 엄마 밑에 일베 아들 난다고, 가르치는 게 오히려 반동을 부르는 건 아닌지 우려되는 바가 없는 건 아니다. 부모란 애정과 안정감의 근원인 동시에 존재 자체로 넘어서야 할 억압이기도 해서, 청개구리 이야기는 그토록 오래 구전돼 왔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는 세계의 물과 공기를 마시며 자연스럽게 도덕근육을 키우기에 너무도 오염된 곳이다. 야구방망이로 같은 반 친구를 구타한 초등생부터 중학생들의 교실 내 집단 자위, 대학가의 잇단 카톡방 성희롱 사건에 이르기까지, 아이 키우는 일이 무서워지는 때가 너무도 많다. 잠시 방심하고 있다간 너무 멀리 가 있는 아이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치기 어렵다.

아이들의 도덕발달을 저해하는 원인은 다양하지만, 그 주범으로 자주 지목되는 건 게임과 동영상이다. 부모가 아무리 반듯하게 살아도 대기처럼 흡입하는 것이 차별과 폭력과 혐오의 세계관이라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것들을 규제하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해결책은 좋은 콘텐츠와 나쁜 콘텐츠를 스스로 구분하고, 쾌와 불쾌의 감각으로 이 판단을 변환할 수 있는 도덕근육의 발달이다. 도덕적 쾌락에 대한 충분한 경험만 축적되면, 유해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도 아이는 얼마든지 자정시스템을 가동할 수 있고, 비판적 사고를 통해 가해의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

고위험사회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우리 모두는 ‘어떻게 하면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되지 않을 까’에만 골몰해왔다. 게임과 동영상으로부터도 내 아이는 피해자일 뿐이다. 하지만 거꾸로 한번 생각해 보자. 혹시 모두가 피해자의 자리에서 세상을 보고 살아온 결과 아이들이 여기까지 오게 된 건 아닐까. 나도 가해자의 부모가 될 수 있다는 자각과 이에 기초한 아이들의 도덕발달이 어쩌면 게임과 유튜브를 규제하는 것보다 더 급박한 일일 수도 있다. 내 아이가 가해자일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품는 일은 자식에 대한 사랑과 배척되지 않는다. 오늘 저녁 우리는 의심의 눈초리로 아이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 그런데 혹시 이것들이 어디 다른 데 가서 문제의 그 게임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박선영 기획취재부 차장대우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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