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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훈의 자동차 현대사] 대우차 전성기의 시작, 라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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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훈의 자동차 현대사] 대우차 전성기의 시작, 라노스

입력
2017.02.1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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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차 전성기를 이끈 '라노스'. 한국지엠 제공
대우차 전성기를 이끈 '라노스'. 한국지엠 제공

1996년 대우자동차의 소형 모델이 라노스로 교체됐다. 르망 이후 시에로와 넥시아로 이어지는 대우차의 소형차 계보를 이어받으며 현대 엑센트, 기아 아벨라의 틈새를 성공적으로 비집고 들어섰다.

라노스는 1996년 11월 16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종합전시장에서 신차발표회를 열고 공식 출시를 알렸다. 대우자동차 김태구 회장은 “대우의 명예를 걸고 개발한 만큼 대우차의 변혁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판매가격은 1.5 SOHC 기본형이 619만5,000원, 1.5 DOHC가 664만5,000원. 경쟁모델보다 10만~20만원 저렴했고, 에어컨 등 옵션 가격도 경쟁사보다 낮게 책정했다.

라노스의 등장 첫날, 업계 관계자들은 경악했다. 단 하루만에 6,709대의 계약고를 올린 것. 그때까지 그런 실적을 올린 사례가 없었다. 이후 라노스는 대우차의 실적을 견인하며 내수 2위인 기아차를 치열하게 추격했다. 라노스는 단 두달만에 이전 모델인 씨에로의 1년치 판매량에 육박하는 실적을 거둘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라노스의 폭발적인 인기는 경쟁사들을 긴장시켰다. 현대차는 당초 쏘나타Ⅲ를 누적 생산대수 1,000만번째 차로 정하려 했던 계획을 수정해 엑센트로 발표했다. 기아차는 아벨라의 무이자 할부판매로 방어막을 쳤다. 모두 라노스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들이었다.

라틴어에서 따온 ‘라노스’라는 이름은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차’라는 의미다. 그 이름처럼 대우를 즐겁게 해줬던 차였다.

시작은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2년 10월 GM과 결별한 대우자동차는 93년 가을 소형차 개발을 위한 ‘S-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세계 10대 자동차 메이커로 도약하기 위해 독자 생존의 길을 시작한 것이다. 소형차 개발코드명은 ‘T-100’으로 정해졌다. 목표는 세계시장을 겨냥한 월드카였다.

문제는 기술. 엔진 설계ㆍ개발 분야의 경쟁력 향상과 현지화를 위해 영국 IAD그룹의 워딩 테크니컬 센터를 인수한다. 대우독일연구소도 설립해 동력전달 계통의 연구를 맡겼다. 이를 통해 대우의 차세대 자동차들이 대거 개발된다. 라노스, 누리바, 레간자 등 대우자동차 전성기를 이끈 모델들이 이들 해외 연구소의 손길을 거쳐 1996년 이후 속속 등장한다.

월드카를 목표로 한만큼 미국 데스밸리, 캐나다의 캐푸스캐이싱, 호주의 알리스스프링스, 영국의 밀브룩 등 가혹한 기후와 도로 조건을 갖춘 세계 곳곳을 찾아다니며 테스트도 거쳤다. 김우중 회장의 관심도 컸다.

1997년 5도어 해치백 라노스 줄리엣, 3도어 해치백 라노스 로미오를 추가하며 라인업을 보강했고 2000년 4월 라노스Ⅱ를 출시했지만 1998년부터 대우그룹이 위기를 맞으며 판매는 신통치 않았다. 2002년 5월 후속 모델 칼로스에 바통을 넘기고 단종됐다.

오토다이어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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