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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삶이 아름다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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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삶이 아름다운 이유

입력
2016.10.07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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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에서 세계 도처에 굴러다니는 무의미하고 단편적인 삶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본 기노쿠니야 서점 자료
일본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에서 세계 도처에 굴러다니는 무의미하고 단편적인 삶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본 기노쿠니야 서점 자료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 지음ㆍ김경원 옮김

이마출판사 발행ㆍ236쪽ㆍ1만3,800원

좋은 학자가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는 ‘모름’에 최대한 오래 머무는 힘이다. 좋은 인간이 갖춰야 할 덕목도 그와 같다. 우리는 너무 부지런히 거인의 어깨 위에 오르려고 하는 나머지 지식의 폐허 위에선 일분도 버티질 못한다.

일본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는 오사카시립대 대학원 문학연구과를 수료하고 2006년부터 류코쿠대 사회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회학 연구법 중 그가 즐겨 사용하는 방식은 어떤 역사적 사건을 체험한 당사자 개인을 직접 찾아가 그의 삶을 채록하는 것이다. 오키나와를 떠나 본토에서 취업했다가 돌아온 젊은이들의 이야기들을 모아 2013년 ‘동화와 타자화’를 냈고, 2014년 책 ‘거리의 인생’에는 노숙자, 섭식장애자, 마사지 걸, 외국인 게이, 뉴 하프(여장 남성)의 목소리를 담았다.

새로 출간된 에세이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그 채록 여정의 후기 성격을 띠고 있다. 저자가 만난 사람보다는 그 사람을 보는 저자의 태도에 방점이 찍힌다. 이 책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그 태도에 있다. 저자의 ‘보통 애호’는 그야말로 보통이 넘는다. “어떤 사람이든 다양한 ‘서사’를 내면에 담고 있다. 그 평범함, 보통다움, ‘아무것도 아님’과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마구 쥐어 뜯기는 것 같다.”

스스로 “중증 인터넷 중독”이라고 말하는 그는 꼭 연구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읽는 데 상당한 시간을 쓴다. 7년 간 데이트 폭력을 당한 끝에 지금은 혼자 사는 여성 이야기, 쓰레기 집(강박적 수집벽 등으로 쓰레기 같은 물건이 가득 쌓인 집)에 사는 파친코 중독자와 그의 히키코모리 딸 이야기, 유흥업에 종사하며 호스트바에 중독된 여성들의 일기. 어떤 이야기는 선정적이고 어떤 이야기는 밋밋하다. 어떤 건 쓸데없이 길고 어떤 건 글보다 이모티콘이 더 많다. 여기서 인간과 삶에 대해 뭘 읽을 수 있을까.

저자가 매력을 느끼는 것은 서사의 질이 아닌 양이다. 100년 전에도 있었고 100년 후에도 되풀이 될, 발에 차일만큼 흔한 삶의 단편들. 먼지처럼 방대한 서사들은 그 자체로 이 세계를 이루는 질료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의 단편적인 인생에는 이모티콘을 많이 쓴 단편적인 서사가 있을 뿐이다. 문화적 가치관을 전도시켜 거기에서 예술적 평가를 끌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서사는 아름답다.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철저하게 고독하며, 철저하게 방대한 훌륭한 서사는 하나하나의 서사가 무의미함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연구 대상으로부터 아무것도 읽어낼 필요가 없다는 그의 말은 학자로선 실격이다. 그러나 분석, 치환, 일반화의 폭력으로부터 저 무의미한 삶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으로선 합격이다. 연구와 분석으로 쌓아 올린 탑을 제 손으로 부수고 바닥으로 내려온 저자의 주변은 폐허가 아니다. 그의 곁에는 살아 숨쉬는 무수한 서사들이 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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