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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은 선거 중] 동성혼 합법화 논쟁... 기성 정치 혐오... 파브리시오 돌풍

입력
2018.02.08 13:3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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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권 ‘시멘트 스캔들’에 분노

기독교도 많아 동성결혼도 반대

신예 복음주의자가 1차서 1위

집권당은 ‘괴짜’ 카를로스 내세워

동성결혼 합법화 공개 지지

세속주의 유권자 결집에 기대

군대도 없고 보편 의료가 보장되는 ‘중남미 최초 민주국’ 코스타리카의 정치에서 최우선시되는 가치는 합의다. 1949년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한 이래 70여년간 부침 없이 민주정을 유지해 왔다. 선거조차도 치열한 정쟁이라기보다 조용한 ‘축제’에 가까웠다.

그러나 올해 4월1일 예정된 대선 결선은 이런 전통에서 한참 벗어날 것으로 보인다. 루이스 기예르모 솔리스 현 대통령을 비롯해 입법ㆍ사법ㆍ행정 3부 모두에 걸친 ‘시멘트 스캔들’ 수사가 정치 불신을 키우더니, 지난 1월9일 미주인권재판소(IACHR)의 동성 결혼 합법화 권고 판결로 촉발된 논쟁이 비제도권 출신의 파브리시오 알바라도 무뇨스(44) 후보를 대선 레이스 1위로 밀어 올린 것이다.

코스타리카 대선 1차 선거가 열린 4일 파브리시오 알바라도 대선후보의 지지자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산호세=AP 연합뉴스
코스타리카 대선 1차 선거가 열린 4일 파브리시오 알바라도 대선후보의 지지자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산호세=AP 연합뉴스

“가수 출신 복음주의자와 소설가 출신 좌파 정치인의 싸움.”

2월 4일 코스타리카 총선과 동시에 치러진 대선 1차 선거가 마무리되자 로이터통신은 결선 구도를 이렇게 요약했다. 후보 가운데 단 한 명도 득표율 40%를 넘기지 못해 결선이 확정되면서 신흥 정당 국가중흥당(PRN)의 가수 출신 파브리시오 알바라도 후보와 기성 여당인 중도좌파 시민행동당(PAC)의 카를로스 알바라도 케사다(38) 후보가 최종 결전을 앞두게 됐다.

서구 언론들은 IACHR의 판결을 계기로 동성 결혼 합법화 문제가 이번 대선의 최대 쟁점이 됐다고 분석했다. IACHR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까지 북미와 남미를 아우르는 국제기구인 미주기구(OAS)의 산하 기구로, 35개 OAS 회원국 가운데 미주인권협약을 비준한 23개국이 관할권을 인정하는 국제사법기관이다.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 등 남미 독재자들의 잔혹범죄를 사면하려는 각국의 결정을 막는 역할을 했다. 2012년에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정권에 맞서 정치범 인권 침해를 막는 판결을 내렸고, 베네수엘라는 이에 반발해 인권협약을 탈퇴하기도 했다.

이런 IACHR의 최대 스폰서 중 하나가 코스타리카였다. IACHR의 본부는 코스타리카 수도 산호세에 유치됐고 이들의 결정은 코스타리카에서만큼은 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동성 결혼 판결이 모든 것을 바꿔 버렸다. 코스타리카는 다른 남미 국가들처럼 국민 다수가 기독교도이며 3분의2가 동성결혼 합법화를 반대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온 바 있다. 솔리스 대통령이 이끄는 현 정부가 IACHR 판결을 근거로 동성결혼을 인정하라는 임시조치 명령을 내렸지만 지방정부는 제대로 입법 과정을 거쳐야 한다며 이를 거부했다.

대선판도 요동쳤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소규모 정당 국가중흥당의 유일한 의원이자 초선 의원에 불과한 파브리시오 알바라도를 유력한 대선 후보로 꼽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파브리시오는 이 결정이 코스타리카의 주권을 침해한다고 못을 박고, IACHR 관할권을 부정하겠다는 공약까지 내걸었다. 이윽고 3%에 머물던 그의 지지율은 순식간에 25%까지 치솟았다. 복음주의 기독교도인 파브리시오는 ‘당신의 사랑은 모든 것(Tu amor es todo)’이라는 찬송가까지 발표한 목회자다.

코스타리카 대선후보 파브리시오 알바라도 무뇨스. 산호세=AP 연합뉴스
코스타리카 대선후보 파브리시오 알바라도 무뇨스. 산호세=AP 연합뉴스

그러나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파브리시오의 돌풍이 단순히 동성결혼 문제에만 기인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기성 정치 혐오가 코스타리카에도 찾아 들었다는 것. 실제로 코스타리카는 경제적 불평등과 불안해진 치안 때문에 민심이 갈수록 흉흉하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2017년 보고서에 따르면 코스타리카 최고 부유층 20%의 임금은 최빈층 20%보다 19배나 높았다. 또 2017년 살인사건은 인구 10만명당 12.1명꼴로 발생해 역대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0만명당 10명이 넘는 살인율을 ‘전염병’으로 판단한다.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것은 지난해 말 불거진 ‘시멘트 스캔들’이었다. 솔리스 현 대통령과 가까운 기업인 후안 카를로스 볼라뇨스가 코스타리카은행(BCR)에서 3,000만달러(330억원)를 대출받아 중국산 시멘트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각종 특혜를 제공했다는 의혹이다. 검찰총장과 대법관이 줄줄이 직무 정지를 당했고 집권 여당의 빅토르 모랄레스 의원도 총선 출마를 포기했다.

이 결과 소위 ‘기성 정당’으로 분류되는 시민행동당(PAC)ㆍ국민해방당(PLN)ㆍ기독사회단결당(PUSC) 등의 후보가 압도적으로 앞서 나가지 못한 가운데 파브리시오와 도널드 트럼프 스타일의 괴짜 후보로 분류되는 후안 디에고 카스트로가 선전했다. 대선 1차 선거와 동시에 진행된 총선에서 국가중흥당은 순식간에 13석을 확보하며 원내 제2당이 됐고, 카스트로가 이끄는 원외정당 국가통합당(PIN)도 원내 4석을 확보했다. 반면 역사가 깊은 우파 자유운동(ML)과 좌파 광역전선(FA) 등은 대선구도에 끼기는커녕 총선에서 역대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파브리시오도 민심을 잘 알고 있었다. 1차 선거 후 사례 연설에서 그는 “코스타리카는 더 이상 똑같은 정치 운동을 원하지 않는다”라며 기성 정권에 대비되는 자신의 참신성을 강조했다. 이어 “코스타리카는 기성 정치인들에게 분명히 선언했다. 더 이상 가족과 어린이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말했다.

코스타리카 대선후보 카를로스 알바라도. 산호세=EPA 연합뉴스
코스타리카 대선후보 카를로스 알바라도. 산호세=EPA 연합뉴스

대선 결선에 오른 파브리시오의 맞수는 그와 완벽한 대척점에 서 있는 집권당 후보 카를로스 알바라도다. 파브리시오와 카를로스는 부계(父系)성이 ‘알바라도’로 같지만 특별히 혈연 관계는 아니다. 파브리시오가 찬송가 가수라면 카를로스는 비록 대학 시절 활동이긴 하지만 프로그레시브 록밴드 보컬 출신이다. 26세에 코스타리카 국영 출판사에서 주는 젊은 창작자상을 수상한 소설가이기도 했다. 언론계를 거쳐 시민행동당의 공보국장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하고 개발사회통합부ㆍ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젊은 엘리트다.

여론이 좋지 않은 현 솔리스 정부를 계승하는 입장이라 카를로스 역시 한때 한자릿수 지지율에 머물렀지만, 파브리시오 등의 참신성을 역으로 파고들어 기성 세력을 지지하는 이들의 표심을 결집하고 제도권의 대표 선수 자리를 얻었다. 그는 일찍부터 동성 결혼 합법화에 공개 지지 의사를 표명해 논란을 정면 돌파했다. 비슷한 기성 정당 계열의 우파 후보 안토니오 알바레스 후보가 동성 결혼 합법화 지지에서 반대로 입장을 조변석개한 것과 크게 대조를 이뤘다.

결국 4월 코스타리카 대선은 지난해 프랑스 대선 결선과 분위기가 비슷해졌다. 마린 르펜을 막으려는 표심이 ‘공화국 전선’을 형성해 에마뉘엘 마크롱에 쏠렸듯이, 과도하게 종교적인 파브리시오를 막기 위해 세속주의 성향 유권자들이 결집해 카를로스 후보에게 대권을 안길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여론이 양분된 만큼 결과를 속단하긴 이르다. 한 원로 의원은 이코노미스트에 “파브리시오의 지지자들은 기성 시스템에 ‘엿 먹어라(give the finger)’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수도 산호세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모라비아지역에 거주하는 심리학자 파울라 로드리게스는 AP통신에 “지금 코스타리카는 완전히 분열돼 있다”라며 “(대선에서) 무슨 결과가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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