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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번째 주 편입 ‘구애’…통과돼도 미국 거부 뻔해

입력
2017.06.09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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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이후 美 자치령

정치권 무능으로 138조원 빚더미

“자치권 포기” 여론 52% 압도적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 투표

지난달 파산보호 신청했지만

트럼프 “지원은 없다” 못 박아

푸에르토리코의 미국 주 편입을 지지하는 주민들이 2일 수도 산 후안에서 성조기를 흔들며 집회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푸에르토리코의 미국 주 편입을 지지하는 주민들이 2일 수도 산 후안에서 성조기를 흔들며 집회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인구 341만명의 섬나라 푸에르토리코하면 야구가 먼저 떠오른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유명 선수들을 다수 배출하며 유망주 산실로 자리매김한 야구 강국이다. 하지만 카리브해의 이 작은 나라가 독립국이 아닌 미국의 자치령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 세기 넘게 국방, 외교 등 외치(外治)는 미 대통령이 행사하고 정부 수반은 일개 주지사처럼 안살림만 꾸려 왔다. 푸에르토리코는 지난달 전 세계 여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무려 1,240억달러, 우리 돈 138조원의 나라빚을 갚을 수 없다며 미연방대법원에 파산 신청을 한 것이다. 그래서 푸에르토리코 정부는 이제 자치권을 포기하고 미국의 51번째 주(州)가 되기를 원한다. 연방정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어서다. 선택의 무대는 11일(현지시간) 치러지는 ‘국가 지위 변경’에 관한 주민투표. 5년 전에 이어 미국을 향한 두 번째 구애이다. 그때도 “기꺼이 본토에 편입하겠다”는 투표 결과가 나왔으나 미 정부는 퇴짜를 놨다. “미국에 속해 있으면서도 미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한 퇴역 군인의 항변은 푸에르토리코가 처한 이런 어정쩡한 현실을 대변한다. 다시 미국의 속주를 택하느냐, 자치 정부로 남느냐, 이도 저도 아닌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느냐, 세 갈래 미래 앞에서 주민들은 망설이고 있다.

몰락의 길 걸은 10년

사실 푸에르토리코의 국가 정체성을 묻는 투표는 네 차례나 있었다. 1967년과 93년, 98년에는 모두 자치령으로 남겠다는 결과가 반복됐다. 표심은 2012년 바뀌었다. 국가 지위 변경에 찬성하는 의견이 더 많았고, 미국의 주가 되기를 희망하는 여론이 61%나 됐다.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민심이 요동친 걸까. 답은 추락을 거듭해온 경제 상황에서 찾아야 한다.

푸에르토리코는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난한 국가도 아니었다. 70년대 중반부터 법인세를 면제한 덕분에 본토 기업들이 들어와 일자리를 만들고 민간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비극은 96년 면세 조치가 단계적으로 중단되면서 싹텄다. 2006년 혜택이 모두 사라지자 대기업과 고급인력들의 본국행 행렬이 봇물을 이뤘다. 미 조사연구기관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푸에르토리코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주민은 40만명이 넘는다. 이 정도 속도라면 2050년 섬 인구는 300만명 아래로 떨어질 전망이다. 주민 절반(46%)이 빈곤에 허덕이고 실업률도 13%를 상회한다.

정치권의 무능과 도덕적 해이는 경제를 더욱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경제위기 조짐이 보이던 2006년 395억달러 수준이었던 푸에르토리코의 부채 규모는 올해 740억달러로 두 배 가까이 폭증했다. 정부와 공기업들이 운영비를 충당하려 월가가 발행한 고수익ㆍ고위험 채권을 마구 사들여 쓴 결과이다. 빚잔치의 대가는 참혹했다. 현재 공립학교 179곳이 돈이 없어 문을 닫았고, 부채에 더해 지급하지 못한 연금도 500억달러에 이른다. 파산 규모는 미 정부기관 사상 최대치다. 블룸버그통신은 “주지사 등 4년마다 지도층이 대거 교체되는 탓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정부 운영 시스템이 화를 불렀다”고 비판했다.

비극 잉태한 제국주의 그림자

주목할 점은 미국의 반응이다. 자치령의 재정상태가 최악인데도 어찌 된 일인지 미 행정부와 정치권의 태도는 뜨뜻미지근하기만 하다. 올해 1월 주민투표 시행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리카르도 로셀로(38) 푸에르토리코 주지사는 지난달 미국 방문길에서 냉대를 당했다. 주민투표 결과가 공식 주 편입으로 나오면 승인해달라는 그의 요청을 미 의회는 끝내 거부했다. 백악관은 2012년에도 무효표가 50만표나 된다는 이유로 국가 지위 변경 투표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120년 전 제국주의 역사는 미국이 푸에르토리코에 거리를 두는 중요한 단서이다. 400여년간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온 이 나라는 주민 대다수가 스페인어를 쓰고 70%가 가톨릭을 믿는 ‘스페인 계열’이다. 1898년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에서 승리해 복속됐지만 애초 동화될 수 없는 관계였던 셈이다. 미국은 전리품을 철저히 이용했다. 2003년 철수 전까지 동부 비에케스섬은 미군이 퍼부은 폭탄과 무기 실험으로 유린당했다. 냉전 시대에는 자치 정부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미연방수사국(FBI)의 공작도 진행됐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시민권은 주되, 대통령 선거권은 부여하지 않는, 쉽게 말해 독립국과 식민지의 경계에 서게 하는 교묘한 수법으로 주민들을 다뤘다. 미 뉴욕타임스는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정권을 잡을 수 없었던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때문에 이참에 차라리 독립을 선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 미 허핑턴포스트는 “푸에르토리코의 미국 주 편입은 ‘몽상(pipe dream)’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푸에르토리코가 목을 매는 미국의 구제금융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원래 푸에르토리코는 미국의 지자체가 아닌 자치령이어서 파산보호를 신청할 수도 없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채무 재조정을 목적으로 마련된 임시 법안(프로메사)을 활용해 가까스로 파산 신청을 강행했으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일찌감치 “지원은 없다”고 못을 박은 상태다.

지난달 실시된 현지 일간 엘누에보디아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 주 편입을 지지하는 비율이 52%로 자치권 유지(17%)와 독립(15%) 여론을 압도한다. 다만 이번에도 미국의 승인을 장담하기 어렵기에 기권 응답이 9%로 나타나는 등 보이콧 움직임 역시 여전하다. 집권 신진보당(PNP)에 맞서 자치령을 옹호하는 인민민주당(PDP)의 헥토르 페레 대표는 “미국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자율성은 물론 문화와 언어 등 전부를 잃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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