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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석학 칼럼] 유엔의 부작위 범죄

입력
2018.03.25 13:0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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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당시 유엔의 목표는 유엔헌장 서문에 명시된 것처럼 ‘전쟁의 재앙’으로부터 미래 세대를 구하고 ‘기본적 인권에 대한 신념’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70년이 지난 지금, 세계는 더욱 많은 첨단 무기를 보유하게 됐으며, 무장 분쟁이 전세계로 맹렬히 번졌다. 그로 인해 대규모 사망자와 전투원 및 민간인의 고통이 발생하고 있다.

가장 널리 거론되는 분쟁의 하나가 시리아 내전이다. 유엔 소식통에 따르면 지금까지 50만 명의 사상자와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서는 무슬림 소수 민족인 로힝야족이 유엔 자체적으로 ‘인종 청소’라고 결론지은 공격에 내몰렸다. 예멘은 참혹한 대리전쟁으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 지역이 됐다. 브룬디와 콩고 민주공화국에도 맹렬한 분쟁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다.

그 모든 영향력을 감안할 때 유엔은 폭력을 중단시키는 데 극히 비효율적 조직이라는 게 증명됐다. 이 점에서 유엔 사무총장은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한다. 어찌 됐건,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의 상징이자 국제 사회의 도덕적 나침반이다. 사무총장의 임무와 권한은 세계에 두루 미친다. 새로운 절차를 통해 선출됨으로써 ‘세계 의회’로 불리는 유엔 총회를 위해 보다 중요한 역할이 부여된 안토니오 구테헤스 사무총장은 특히 더 그렇다. 그에게는 덜 폭력적이고도 보다 인간적인 미래로 우리를 인도해야 할 의무가 주어졌다.

2018년의 시작과 함께 구테헤스 총장은 세계에 ‘경고’를 발하면서 "우리는 갈등을 해결하고 증오를 극복하며 공동의 가치를 지킬 수 있다. 다만 함께 힘을 합칠 때 이 모든 가능하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는 첫 걸음에 불과하다. 그는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해야 한다.

우선 조직의 도덕적 청렴성 및 가치를 진작시키기 위해 그가 가진 영향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또한 분쟁 해소 방안과 관련해 최고위급 수준의 개입이 가능하도록, 유엔 특사의 활동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유엔 안보리를 향해 현재 상태에 만족하는 안이한 태도는 유엔 헌장에 위배되는 것은 물론이고 부작위 범죄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일깨워야 한다.

안보리는 유엔에서 평화와 안보를 유지하는 주된 책임을 갖고 있다. 분쟁을 해결하고 적대 행위를 종식시키기 위해 외교전을 펼 수 있으며 강제 조치에 대한 선택권도 갖고 있다. 그러나 이사회는 이 역할을 극대화하는 데 실패했다. 중국과 프랑스, 러시아, 영국, 미국 등 5개 상임 이사국(P5)이 거부권을 사용하거나 위협하는 방식으로 자국의 이해를 앞세우기 때문이다.

‘분쟁의 당사국일 때는 투표를 기권해야 한다’는 상임 이사국의 거부권에 대한 유일한 제한은 안보리에서 결정할 때 중립성 유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할 뿐이다. 그러나 P5 입장에서 국제법 위반이나 대규모 인적 피해는 현실정치나 ‘지정학적 고려’에 경종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심지어 유엔이나 유엔 헌장, 세계질서에 기반한 규칙을 직접 침해하는 정책을 추구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 적대 행위를 가중시키기도 하는 P5의 분쟁 종식 실패는 중소 규모 국가에 더 치명적인 폭력과 고통을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보다 근본적으로 유엔과 국제법에 대한 신뢰를 훼손시키고 비인도적 행위에 대한 내성만 키웠다. 또한 더 많은 살상과 파괴, 고통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젖혔고, 유엔이 설립됐을 때 우리가 엄숙하게 약속한 세계 질서는 망가졌다.

미국과 러시아는 P5의 실패에 특별한 책임을 져야 한다. 분쟁을 점검하고 해소하기 위해 정치적 영향력과 군사력을 사용하는 대신, 더 극심한 혼란과 불행만 초래하는 게 역사적으로 증명된 전략적 경쟁을 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P5의 나머지 세 국가가 국제 평화와 안보를 지원하는 안보리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투쟁에서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들은 안보리가 집단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촉매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세계 질서 개선에 핵심적 역할을 해야 할 P5 모두가 질서 유지에 머물면 안 된다. 도리어 필요한 개혁을 추구함으로써 세계질서에 대한 신뢰를 일신해야 한다. 이는 그들이 공동 이익과 공통 가치에 우선 순위를 두고 책임감 있게 거부권을 행사할 것임을 세계에 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준수해야 할 간단한 규칙이 있다면, P5 가운데 최소 두 국가가 반대하지 않는 한 안보리 이사국 대다수가 지지하는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 방안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P5뿐만 아니라 모든 안보리 이사국을 참가하는 토론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방식으로 안보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 것이다.

국제사회의 플레이어는 개별 국가의 주권을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유엔과 유엔의 힘있는 플레이어는 광범위한 살상과 파괴를 낳고 있는 분쟁에 직면해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런 책임은 유엔 헌장에도 명시돼 있지만 그들은 너무 오래 동안 책임을 방기한 채 권리만 행사해 왔다.

나빌 파미 전 이집트 외무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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