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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왜 일회용품 취급하는지...” 파견 노동자의 시린 세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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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왜 일회용품 취급하는지...” 파견 노동자의 시린 세밑

입력
2015.12.3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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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노동자 5명 중 1명 안산에

불법 마다 않는 파견업체만 불어나

경기침체 탓 구직도 어려워져

“언제 또 잘릴지…” 불안 안고

차별 대우ㆍ인권침해 참고 살아

“파견업종 확대법 통과되면

질 나쁜 일자리만 늘어날 것”

29일 오전 경기 안산시 안산역 일대에 늘어선 파견업체 중 한 곳으로 구직자가 들어서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29일 오전 경기 안산시 안산역 일대에 늘어선 파견업체 중 한 곳으로 구직자가 들어서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올해를 이틀 앞둔 29일 서울을 출발해 경기 안산시 단원구에 있는 지하철 4호선 안산역에 내렸다. 초조한 표정의 사람들도 어디선가 떠밀리듯 무리를 지어 속속 도착했다. 역에서 나오자 기자를 반긴 건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광고판들이었다. ‘전화 상담 환영’ ‘간단한 면접 후 바로 출근 가능’ ‘숙식 제공’ ‘정규직 전환 가능’ 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건너마다 한두 개씩 들어선 근로자 파견업체들이 구직자를 찾는 구인광고였다. ‘파견 노동 1번지’ 안산의 첫 모습이었다. 안산에는 전국의 파견직 노동자 5명 중 1명이 일하고, 파견업체는 300곳이 넘는다. 광고들의 구인직종은 비닐하우스 야채재배ㆍ가두리 양식장 관리부터 기계부품 가공ㆍ로보트 용접ㆍ자동차 부품 조립ㆍ전자제품 회로기판(PCB) 불량 검사 등으로 다양했다. 파견법은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에 파견을 금하고 있지만 안산에선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지하철에서 함께 내린 허름한 트레이닝 바지에 모자를 눌러쓴 20대 남성과 동남아시아에서 온 30대 이주여성, ‘뽀글파마’를 한 50대 아주머니의 행선지도 이들 파견업체였다. 그러나 현장에서 만난 파견직 구직자들의 표정은 계속되는 경제의 어려움 탓인지 밝지 않았다. 현장에서 만난 신모(53)씨는 이날 파견업체 4곳을 들렸으나 모두 허탕을 쳤다. 그는 “광고로는 장기근무가 가능하다지만 6개월 이하 초단기 계약이 대다수”라며 “내년에 경제가 더 어렵다던데 직장을 구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경기 화성 근무. 자동차 부품 조립. 월급 210만~230만원. 기숙사 3인 1실’ 공고를 보고 H파견업체에 들어간 박모(32)씨는 “벌써 마감됐다고 해서 전화번호를 남기고 왔다“고 했다. 그는 “경기가 안 좋아서 그런지 파견일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아졌다”고 전했다.

기자가 찾은 S업체도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일자리를 구하러 왔다”고 하자 자신을 ‘김 부장’이라고 소개한 한 남성이 반월공단 내 자동차 부품사를 소개했다. 근로시간은 오전8시부터 오후8시30분까지, 일당은 7만8,000원이었다. 다만 김 부장은 “필요한 인원이 수시로 바뀌어 언제 일할지 약속할 수는 없고, 회사측 연락이 오면 바로 알려주겠다”며 기자를 ‘대기조’에 편성했다. 장기근속이 가능할지 묻자 그는 “일단 일을 해보고 나중에 결정해도 된다”고 말끝을 흐렸다. 업황이 나빠지면 계약이 일찍 해지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혔다.

파견직 찾기에 성공한 이들도 불안하고 고달프긴 마찬가지다.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 낮은 복지혜택, 차별 대우에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반월공단의 PCB업체에서 넉 달째 일하는 이모(23)씨는 “겨울이 비성수기라 언제 또 잘릴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는 오전8시부터 오후8시30분까지 2교대로 나흘간 일하고 이틀을 쉰다. 월급은 180만원. 이 업체에서 이씨와 함께 일하는 파견자는 100여명인데, 생산라인 위에 폐쇄회로(CC)TV가 설치돼 있어 근무강도가 녹록지 않다. 사적인 일로 연차휴가를 내려면 증거자료를 제출해야 하고, 노조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근로계약서도 써야 했다. 고교 3학년 때 야간 생산 파견직으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후 4년간 파견직을 전전해야 했다. 이씨는 “전문성을 쌓기 힘들다 보니 경력을 앞세워 더 나은 직장을 잡는 게 불가능했다”며 “파견직은 실패한 인생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자조했다.

고교 졸업 후 20세부터 파견직으로 일해 온 이모(28)씨는 삼성과 LG에 휴대폰 케이스를 납품하는 인천 부평의 제조업체에서 파견직으로 10개월 일하다 지난달 해고됐다. 출근 당일 파견업체가 “물량 감소로 10명의 인원을 삭감하라는 지시가 있어 오늘부터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화로 통보하면서 한 순간에 실업자가 됐다. 이씨는 “무리한 업무지시와 차별 대우가 일상이었다”고 지난 8년을 회상했다. 같은 일을 하는 정규직과 비교해 시급이 800~1,200원 적었고, 지급되는 작업복은 정규직이 연간 4벌, 파견직은 2벌 이었다. 명절선물은 정규직이 견과류ㆍ표고버섯ㆍ스팸ㆍ양말세트 중 고를 수 있었으나 파견직은 식용유 세트가 전부였다. 이씨는 “사소한 차별 하나하나가 자존감에 큰 생채기를 냈다”며 “파견직은 언제든 쉽게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새해엔 꼭 정규직으로 취업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씨가 정규직을 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는 정규직 진입이 어려운 저학력자, 경력단절여성, 중장년층, 청년 등 취업취약계층에 속해 있다. 더구나 국회에는 주조ㆍ금형ㆍ용접ㆍ표면처리ㆍ소성가공ㆍ열처리 업종으로 파견을 확대하는 파견법 개정안이 논의 중이다. 박재철 안산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장은 “파견직의 어려운 현실을 해결하지 않고 파견업종을 확대한다면 질 나쁜 일자리만 늘게 된다”고 했다. 법이 통과되면 안산의 파견직 비중만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당사자가 1회용품에 빗댄 파견직의 열악한 현실은, 파견업체와 원청업체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동원하는 계약해지와 재고용, 위장폐업과 맞닿아 있다. 제조업체는 물량폭주 등 일시ㆍ간헐적인 사유에 의해 최대 6개월까지 파견직을 쓸 수 있게 허용한 파견법의 예외조항을 악용한다. 6개월이 지나면 같은 자리에 다른 파견노동자를 고용하거나, 6개월 근무한 파견직을 우선 해고하고 2,3주 뒤 재고용 하는 식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일시ㆍ간헐적인 사유로 허용된 파견노동자 비율은 2010년 23.5%(2만3,614명)에서 2013년 31%(4만924명)으로 증가 추세다. 1년 이상 일하면 줘야 하는 퇴직금을 이유로 파견업체가 위장 폐업한 뒤 회사 이름만 바꿔 다시 문을 여는 일도 다반사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당장 사용자의 이윤을 보장해줄지 몰라도 미숙련 노동에 의존하는 현실을 바꾸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산업 경쟁력을 떨어트린다”고 말했다.

안산의 세밑풍경은 침침한 날씨처럼 회색 빛이었지만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었다. 기자를 파견직 대기 명단에 올려 놓은 S업체 김 부장의 전화 연락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안산=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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