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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칼럼] 내 아이만 안전한 사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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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칼럼] 내 아이만 안전한 사회는 없다

입력
2012.09.05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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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바로 저긴데…. 아무리 일어나서 집에 가려 해도 안됐어요. … 미안해요, 아빠." 나주 성폭행 피해어린이가 아빠 품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했다는 얘기다. 경찰은 아이가 정신을 거의 잃은 상태에서도 '잃어버리면 혼날까 봐' 이불을 꼭 끌어안고 있더라고 했다.

제게 일어난 일이 얼마나 엄청난지도 모르는 아이의 말에 가슴이 미어지고, 당장 부모에게 혼날 일이 더 두려운 심리상태가 너무 가엽다. 고운 심성 때문이지만 한편으론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해 억눌린 의식의 전형적 반응이다. 아이는 외로웠을 것이다. 마을 어른들에게 유난히 착하고 밝았다는 태도는 사랑과 관심에 대한 갈증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앞서 통영에서 희생된 열살 아름이도 부모 불화로 거의 혼자 방치돼 생활했다. 그래서 더 스스럼없이 이웃어른들을 따랐다. 나주 사건에서처럼, 그렇게 따르던 이웃 중에 악마가 있었다. 등굣길에 친한 동네아저씨를 만나 반갑게 트럭에 올라탔다 그대로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됐다.

연이은 아동 성폭행사건으로 온 사회가 격앙돼 있다. 처벌형량을 최대한 높이라는 여론이 급등하고 급기야 사형 주장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치안무능에 대한 질타가 들끓고, 나아가 사회구조적 측면에서의 온갖 진단과 처방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틀린 말은 하나 없다. 비슷한 수준의 국가 중에서 아동대상 범죄에 대한 처벌과 감시가 우리만큼 관대하고 느슨한 경우는 없다. 아동 성범죄 평균형량 3.4년은 성도착자들이 이상쾌감의 대가로 충분히 감수할 만한 수준이다. 철학적 논쟁을 배제한다면 "이런 놈들을 왜 살려두냐"는 주장도 법 감정이나 비교형량의 원칙상 무리할 게 없다.

다만 한계효용 법칙처럼 징벌도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범죄예방 효과가 줄어든다든가, 또는 단순범죄를 살인범죄로 만드는 부작용도 있는 만큼 중형(重刑)주의가 결코 만능은 아니다. 흔히 경제사회체제 전반에 원인을 돌리는 사회구조적 거대담론은 자칫 뜬구름 잡는 식으로 흘러 구체적 책임소재나 흐리기 십상이다.

사실 아무리 사회안전망을 잘 갖춘다 해도 도착적 범인들에 의한 돌발범죄는 막을 방법이 없다. 사회의 개인화, 파편화로 발생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해도 현대 모든 유형의 엽기범죄는 아득한 과거부터 다 있었던 것이다. 소아기호증 범인에 의한 아동 성폭행살인사건도 1920년대 서울 수도권에서 연쇄 발생해 당시에도 크게 사회문제가 됐다. 묘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어쨌든 정부사회에 대한 요구는 합당하다 해도, 논점에서 정작 결정적으로 빠져있는 건 우리 스스로의 책임 부분이다. 범죄예방에서 법적ㆍ사회경제적 대책보다 더 중요한 게 사회구성원들의 관심과 의지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웃과 아이들에게 눈길 한번 더 주고, 혹 이상한 낌새라도 감지하면 주변이나 공공기관을 통해 관심을 갖도록 하는 일이다. 이게 그나마 효과적이고 현실적인 안전망이다. 주변의 관심으로 촘촘히 짜인 이런 네트워크 안에서는 혹 도착적 정신질환자라도 섣불리 범죄충동을 실행하기 어렵다.

1962년 '두형이 사건' 이후 한창 유괴살인 사건이 빈발하던 어린 시절 집 앞에서 유괴돼 수 ㎞나 떨어진 종로 번화가에서 구출됐던 개인적 경험도 있다. 인파 속을 지나던 아주머니가 왠지 꺼려하는 아이 모습이 얼핏 이상해 보여 "너 어디 가니?"하고 아는 체하는 순간 유괴범이 손을 놓고 달아났다. 만약 그 때 그 아주머니의 관심이 없었더라면….

나주의 피해어린이는 범행 후 11시간이 넘어서, 그것도 경찰이 신고를 받고 대대적인 수색에 나선 뒤에야 발견됐다. 아이는 그 긴 시간 발가벗은 채 젖은 이불을 움켜잡은 자세로 강가 대로 변에 방치돼 있었다. 숱한 운전자들이 지나가며 그 참혹한 모습을 보았을 텐데도 다들 무심히 지나쳤다.

이러면서 남 일처럼 분노하고 안전한 사회를 부르짖는 건 위선이다. 내 가족, 내 아이만 안전한 사회란 어디에도 없다.

이준희 논설실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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