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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족관 아닌 태평양서 '고래관찰' 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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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족관 아닌 태평양서 '고래관찰' 체험기

입력
2017.05.2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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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서울대공원에서 20년 동안 공연을 하던 남방큰돌고래 금등이, 대포가 제주로 향했다. 두 고래는 얼마간의 야생적응훈련을 거친 후 원서식지인 제주 바다로 돌아간다.

동물복지의식이 성장한 가운데 외국에선 고래류의 수족관 전시는 '한물간' 산업이 된 지 오래됐다. 법으로 고래류 전시를 금지하는 국가도 많다. 지난해부터는 범고래쇼의 본고장인 미국 캘리포니아에서조차 범고래쇼와 번식도 금지됐다.

고래류를 수족관에 가두고 구경하는 게 잔인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으면서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고래관찰(Whale watching)'산업이다. 배를 타고 나가서 야생에서의 고래를 관찰하는 고래관찰산업은 1950년대 미국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큰 폭으로 성장했다. 국제동물복지기금(International Fund for Animal Welfare, IFAW)이 2009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991년 400만명이었던 고래관찰 관람객 규모는 2008년에는 1억3,000만 명으로 증가했다. 또한 고래관찰 운영 국가 또한 31개국에서 119개국으로 세 배 가까이 증가했다. 고래관찰 시장규모는 연수익 20억 달러에 달한다. 범고래쇼의 본고장인 미국 캘리포니아에서조차 2016년 범고래쇼와 번식이 금지되면서 고래관찰산업의 수요는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

범고래 여러 마리가 무리를 지어 헤엄치고 있다. 대표적인 범고래 서식지인 미국 워싱턴 주 퓨젓사운드 만에서는 배를 타고 고래를 관찰할 수 있다.
범고래 여러 마리가 무리를 지어 헤엄치고 있다. 대표적인 범고래 서식지인 미국 워싱턴 주 퓨젓사운드 만에서는 배를 타고 고래를 관찰할 수 있다.

지난 5월 5일, 나는 범고래를 보기 위해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북쪽으로 15㎞떨어져있는 에드먼즈 항에서 고래관찰선에 탑승했다. 워싱턴 주의 퓨젓사운드 만은 범고래가 서식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이곳에서 관찰되는 범고래는 태평양 북서쪽 해협에 평생을 머무르는 정주형 범고래와 먹이를 찾아 이동하며 사는 이동형 범고래로 나뉜다. 워싱턴 주 어류야생국에 따르면 2016년 기준으로 84마리의 정주형 범고래가 서식하고 있다.

정주형 고래와 이동형 고래는 생태학적으로 다른 종이며 형태나 습성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먹이다. 정주형 범고래는 어류를 먹는 반면 이동형 범고래는 물범, 바다사자, 다른 고래류 등 해양 포유류를 먹이로 삼는다. 정주형 범고래가 가장 좋아하는 연어 종인 치누크 연어가 많은 5월부터 9월 사이에 관찰하기 쉽다. 정주형 범고래가 많게는 50마리에 달하는 큰 무리를 이루고 사는데 비해 이동형 범고래는 2마리에서 5마리 사이의 직계가족으로 이루어진 작은 무리를 형성한다.

정주형 범고래는 워싱턴 주 북서부의 샌후안 섬 주변에서 주로 관찰된다. 하지만 그 전날 범고래 무리가 남쪽을 향해 이동하는 것이 목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선장은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렸다. 고래관찰선에는 항해하는 동안 고래에 대해 설명하는 '내추럴리스트' 바트 룰론 씨가 함께 탑승했다. 룰론 씨는 지역에서 수년 동안 야생동물전문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범고래를 관찰해 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고래학자는 아니지만 고래의 등지느러미 모양만 봐도 이름을 맞출 수 있고, 누가 누구의 엄마이고 증손녀인지 족보를 꿰고 있어 전문가에게 버금간다.

갇혀있는 동물을 볼 때와 야생에서의 동물을 만날 때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기다림'이다. 수컷은 등지느러미가 높고 삼각형으로 솟아있지만 암컷은 높이가 낮고 낫처럼 둥근 모양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고래가 보일 만한 지점에서 약 30분에 한 번씩 배를 세우고 관찰했지만 고래는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고래의 움직임은 아닌지, 몇 시간 째 흔들리는 물결을 노려보고 있자니 나중에는 헛것이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세 시간이 흐르고, '오늘 고래를 보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서로 주고받던 중 누군가 외쳤다.

"저기 고래다!"

범고래를 보기 위해 꼬박 세 시간을 기다렸다. 범고래가 나타난 뒤 승객들은 감탄하는 한편 수족관에 갇힌 범고래를 본 경험을 이야기하며 안타까운 감정을 드러냈다.
범고래를 보기 위해 꼬박 세 시간을 기다렸다. 범고래가 나타난 뒤 승객들은 감탄하는 한편 수족관에 갇힌 범고래를 본 경험을 이야기하며 안타까운 감정을 드러냈다.

배 왼편으로 군무를 추듯 유영하는 범고래 무리의 모습이 보였다. 하나, 둘, 셋. 흰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사라지는 등지느러미의 숫자가 멀리서 보기에도 20마리 이상처럼 보였다. 어미 옆에서 당차게 물살을 가르는 어린 범고래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배는 고래 가까이 다가가는 대신 즉시 움직임을 멈추고 엔진을 껐다. 갑판에 나온 승객들은 일제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카메라의 줌 렌즈로 고래 떼를 관찰하던 룰론 씨가 말했다.

"이동형 범고래 네다섯 무리가 함께 있습니다. 보통 이렇게 많은 무리가 어울리지 않는데, 오늘 우리가 운이 좋네요."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보던 범고래를 직접 보는 경험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로웠다. 범고래 수족관이 없는 독일과 영국에서 온 관광객들도 태어나서 범고래를 처음 본다며 놀라워했다. 반면 미국 각지에서 온 대부분의 승객은 최소한 한 번은 씨월드 수족관에서 범고래쇼를 본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모두 "수족관에서 본 범고래와는 다른 동물 같다"고 입을 모았다. "우리가 동물에게 무슨 짓을 해 온 것인가", "다시는 갇혀 있는 동물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고래관찰선은 수족관에 갇힌 고래를 보는 것에 비해 '착한' 관광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고래관광이 고래의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됐다. 배의 엔진 소음이 먹이를 사냥하거나 이동할 때 반향정위(스스로 낸 소리가 물체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음파로 위치를 측정하는 기술)를 사용하는 범고래의 생존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범고래가 선박과 충돌하는 일도 잦다. 영국 에버딘 대학의 해양생물학자 데이비드 루소는 지난 2006년에 "고래관광선 때문에 범고래의 먹이활동 시간이 줄어든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어 2014년에는 "아이슬란드의 밍크고래가 고래관광선을 감지하면 호흡 빈도가 증가하고 헤엄치는 속도가 빨라지는 등 천적을 보았을 때와 유사한 반응을 보인다"고 밝혔다.

지난 2008년 워싱턴 주는 범고래 주위에서 선박의 활동을 제한하기 위한 법을 통과시켰다. 고래관찰선은 고래로부터 200야드(약 182m) 이상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400야드(약 365m) 반경 내에서 범고래가 이동하는 방향에 위치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미국 해양대기관리처(NOAA)는 고래관광선이 고래로부터 100야드(약 91m) 이상의 거리를 유지하고 고래를 쫓아가거나 무리를 분산시키지 않을 것 등을 권고하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있다.

애드먼즈 항구 해변가의 혹등고래 사체와 사체를 뜯어 먹는 코요테. 혹등고래는 한달 전쯤 폐사 고래연구소에서 사인을 밝히기 위해 사체 일부를 채취해 갔다.
애드먼즈 항구 해변가의 혹등고래 사체와 사체를 뜯어 먹는 코요테. 혹등고래는 한달 전쯤 폐사 고래연구소에서 사인을 밝히기 위해 사체 일부를 채취해 갔다.

15분 남짓한 범고래와의 조우를 마치고 항구로 돌아오는 길. 해변에 거대한 물체가 눈에 띄었다. 혹등고래의 사체였다. 룰론 씨의 설명에 따르면 한달 전쯤 폐사했고 고래연구소에서 사인을 밝히기 위해 사체 일부를 채취해 갔다고 했다. 배가 가까이 다가가자 죽은 고래를 뜯어 먹다 고개를 든 코요테와 시선이 마주쳤다.

승선을 마친 뒤 배에 설치된 화면을 통해 우리가 만났던 범고래 무리를 촬영한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등지느러미 사진이 담긴 차트와 사진을 대조해 목격한 고래의 이름을 확인하는 방법을 배웠다. 눈여겨봤던 아기고래는 2014년 3월에 태어난 고래와 등지느러미가 일치했다. 왠지 모르게 이 아기고래와 특별한 관계를 맺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난 1월 이 지역의 정주형 범고래 무리에서 증조할머니 격인 '그래니'가 10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을 생각하면, 아기고래가 나보다 오래 살 가능성이 크다. 고래가 다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한 번쯤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시 고래관찰선을 타는 것은 왠지 욕심이 과한 것 같다. 다시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범고래가 좁은 수족관이 아닌 태평양 바다 어딘가에서 헤엄치며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가슴 뛰는 일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우리나라 제주 바다에는 육지에서도 관찰이 가능한 남방큰돌고래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글ㆍ사진=이형주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어웨어(AWARE)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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