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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코끼리

입력
2017.12.03 13:2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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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이 있는 장소에 도착한다. 벌써 서른 명쯤 사람들이 모여 있다. 안내하는 분이 다가와 이름을 묻는다. 내가 미처 이름을 말하기 전에 그녀는 내 뒤에 들어온 어느 작가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며 급히 이름표를 찾아 준다. 그 새 나는 이름표가 쌓여 있는 책상으로 다가가 직접 내 이름을 찾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는다. 내 손은 자꾸 초조해진다. 안내하는 분이 다가와 다시 이름을 묻는다. 나는 이름을 말하는 대신 이름표 없이 그냥 들어가면 안 되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녀는 상냥하고 집요하게 나의 이름을 묻고, 나는 대답하고, 내 눈에는 보이지 않던 이름표가 드디어 어디선가 나타난다.

이름표를 목에 걸고 자리에 앉는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온 작가들과 우리나라 소설가 시인들이 어울려 앉아 있다. 사회자가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각자 자신의 문학에 대한 소개를 하자고 제안한다. 간단하게 내 소개만 하면 될 줄 알았던 나는 ‘자신의 문학’이라는 말에 머릿속이 하얘진다. 벌써 오래 전부터 문학은 나에게 절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코끼리가 되어 버렸으니까.

“저는 베트콩이었습니다.” 베트남에서 온 작가가 말문을 연다. 오랜 전쟁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베트남의 역사, 감옥소에서 고문을 당하고 죽은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그녀의 문학과 삶의 이야기에 무심코 귀를 기울이다가 나는 한 마디 말에 사로잡힌다. 수풀 속에서 독사에 물려 죽을 수도 있고, 지뢰나 폭탄이 터져 죽을 수도 있고, 고문을 당해 죽을 수도 있는, 온통 죽음에 둘러싸인 일상 속에서 “나는 죽음에 대해 오만해지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라는 말.

인도네시아 작가가 펴낸 책의 표지 사진들이 뜨고 설명이 이어진다. 여성들의 삶과 섹슈얼리티, 카스트, 정치성 그런 단어들이 들려오지만 바로 그 다음 순서로 나의 ‘문학’을 소개해야 한다는 긴장감 때문에 머릿속에서 의미가 잘 연결되지 않는다.

막상 내 차례가 되자 모든 것이 순조롭고도 빠르게 지나간다. 말을 더듬었고 사소한 이야기를 했지만 내가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된 것이다. 재능과 열정이 넘치는 작가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며칠이라도 자신의 나라를 떠나 이곳에 오게 되어 행복하다는 태국 작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나는 점점 의아함을 느낀다. 그가 설명하고 묘사하는 자신의 나라는 내가 몇 년 전 그 나라 어느 도시에서 한 달쯤 머무르며 받은 인상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관광객으로서 나는, 그의 표현대로, ‘그림엽서’라는 평면을 들여다 본 것에 지나지 않았던가. 내가 머물던 동네의 채소가게 주인을 떠올린다. 그녀는 마사지숍이나 식당에서 만난 친절한 태국인들 같지 않았다. 무뚝뚝했다. 내가 채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귀찮아하며 이름을 가르쳐주곤 했다. 감자, 양파, 당근, 마늘 모두 비현실적으로 싼 가격이었으나, 당연히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태국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시야를 좁힌다. 명확하게 밖에 있거나 혹은 한 가운데 있으면 보아야 할 것으로 규정된 것만 보게 되기 쉽다. 소설가가 되기 전 나는 문학을 선망했다. 간신히 소설가라는 정체성을 붙잡고 있을 때 문학은 나에게서 더 멀어졌고, 그것은 쓰라린 경험이었다. 소설가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태인 채 문학의 주변부를 맴돌고 있는 사람으로 참석한 자리에서, 뜻밖에도 나의 정념이나 자의식과 상관없는 문학, 얼마든지 생각해도 되는 코끼리와 우연히 마주쳤다. 내가 아닌 존재, 내가 아닐 수밖에 없는 존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이로움. 문학은 늘 그것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그 감각과 의미를 되살리고 일깨웠다. 오랫동안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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