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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국이지만 봐도 좋을 ‘에르메스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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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국이지만 봐도 좋을 ‘에르메스의 산책’

입력
2016.11.2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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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의 첫 브랜드 전시인 ‘Wanderland(파리지앵의 산책)’에 재현된 19세기 파리의 아케이드. 에르메스 제공
에르메스의 첫 브랜드 전시인 ‘Wanderland(파리지앵의 산책)’에 재현된 19세기 파리의 아케이드. 에르메스 제공

발터 벤야민을 에르메스보다 먼저 떠올리게 되는 공간이다. 지팡이를 짚은 신사와 우산을 든 숙녀가 화려한 파리의 아케이드를 산책한다. 찬란하게 빛나는 상아빛 식기와 고급스런 마구(馬具), 여행용 트렁크와 아름다운 시계, 핸드백까지. 19세기 파리의 아케이드를 통해 자본주의의 유년을 탐색하고자 했던 이 망명 철학자의 모더니즘 기획이 이곳에서 재현됐다고 착각해도 좋겠다.

서울 한남동 디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Wanderland(파리지앵의 산책)’는 에르메스 최초의 브랜드 전시다. 에르메스 미술상과 아틀리에를 운영하는 미술전시의 달인들답게 들어가는 순간 훅 하고 빠져들었다가 나오는 순간 아 하고 탄식하게 되는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럭셔리 패션 브랜드들이 앞다투어 미술관 전시를 연 지 제법 됐지만, 그동안은 단순한 제품 홍보나 아카이브 컬렉션 소개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에르메스는 이번 첫 전시에서 제품을 미장센으로 후면화하는 세련된 스토리텔링 전략을 취했다.

에르메스는 창립 150주년을 맞아 1987년부터 매년 연간 테마를 발표, 브랜드와 제품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데, 2015년 테마가 산책(flâner)이었다. 에르메스의 본질이자 영감의 원천인 산책이 테마로 채택된 것을 기념해 꾸민 전시가 ‘Wanderland’. 산책이라는 일상에서의 탐험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공간들로 공들여 구성했다.

광고판 기둥이 설치된 파리의 광장을 재현했다. 천장을 바닥으로 삼은 위쪽은 19세기의 파리, 아래쪽 바닥은 21세기의 파리를 의미한다. 광고기둥 속 가방들은 당연히 에르메스 핸드백이다. 에르메스 제공
광고판 기둥이 설치된 파리의 광장을 재현했다. 천장을 바닥으로 삼은 위쪽은 19세기의 파리, 아래쪽 바닥은 21세기의 파리를 의미한다. 광고기둥 속 가방들은 당연히 에르메스 핸드백이다. 에르메스 제공

입구에서 나눠주는 돋보기 달린 나무 지팡이를 들고 전시장에 진입하면 쇼핑 아케이드와 비 오는 공원의 벤치, 광장의 광고판, 엿보게 되는 창문 열린 저택, 다리를 쉬어가는 카페 공간, 그래피티로 도배된 지하철역 등을 차례대로 거쳐가게 된다. 에르메스의 가방과 그릇, 시계, 넥타이 등과 함께 아카이브에서 골라온 에르메스 가문의 수집품들이 시공간의 환상이동을 재촉한다.

관람객에게 주어지는 지팡이는 중요한 소도구다. 지팡이 끝 렌즈를 전시 공간 곳곳에 숨겨진 동그란 화면에 대면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자유, 독창성, 상상력 등을 주제로 한 깜찍한 일러스트 애니메이션이 상영된다. 지팡이 렌즈는 런던, 파리, 두바이를 거쳐 네 번째로 열린 한국 전시에서 처음 도입된 장치다.

디지털 기술을 통한 시공간의 판타지를 보여주는 에르메스 전시는 시대와 공간을 재현하는 유쾌하고 세련된 상상력이 돋보인다. 제품을 어느 자리에 언제 놓아야 산책에 방해가 되지 않는지를 절묘하게 잘 알고 있다는 점도 유머러스하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애정 어린 논쟁을 하고 있을 것 같은 어두운 카페에 앉으면 테이블 속 작은 유리 밑에 에르메스 시계가 있고, 19세기 파리 광장에 거꾸로 박힌 광고기둥 판에는 형형색색의 에르메스 핸드백이 들어 있는 식이다. 우디 앨런이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그려낸 벨 에포크 속으로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 흥겨운 쾌락이 남녀노소 모두 향유 가능하다.

에르메스 총괄 아티스틱 디렉터인 피에르-알렉시 뒤마는 “도시를 거니는 행위 자체가 아름다우면서 자유로운 예술이며 에르메스를 대표하는 중요한 본질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파리라는 도시와 모더니즘이라는 유산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은 브랜드 스토리텔링이다. 전시는 12월 11일까지 열리며 무료다. 연령 제한 없어 아이들과 함께 가기도 좋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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