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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무당통치’와 문명국가의 조건

입력
2016.10.2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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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무렵이었다.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10년을 거치며 이제 우리도 형식적이나마 민주주의를 완성했으니 새로운 국가 아젠다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산업화, 민주화, 그렇다면 그다음은 무엇일까.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것은 이제 겨우 우리가 정상적인 보통의 국가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보다 나은 삶의 양태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면 다음 단계는 문명화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리학자로서 과학적 방법론에 기초한 문명사회를 꿈꾸었던 것은 어쩌면 내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해 연말 대선 정국에서 당시 이명박 후보의 이른바 BBK 관련 ‘광운대 동영상’이 “주어가 없다”는 한마디로 뭉개졌을 때 나는 큰 좌절을 느꼈다. 기록은 문명의 기본이다. 기록 문명에 관한 한 직지심경부터 한글에 이르기까지 내세울 게 많은 나라에서 그것도 21세기 과학 문명의 시대에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비슷한 반문명적 행태는 5년 뒤 대선에서 이른바 ‘NLL 대화록’ 조작극으로 반복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박근혜 정권에게 뭔가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태는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의 시대에 야만의 갈라파고스가 돼 버린 한국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번에 드러난 최순실 게이트는 그 모든 야만이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무당통치’에서 비롯됐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은 ‘무당통치’가 민주공화국 헌정을 유린한 사건이다. 고관대작들이 머리를 조아렸고, 반발하던 공무원들이 잘려나갔고, 재벌들은 돈을 뜯겼다. 북핵문제, 위안부 협상, 사드 배치 등 국민의 생명과 국가안위와 직결되는 문제가 어떻게 농락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른 무엇보다, 대통령이라는 헌법기관 자체가 실질적인 권력서열 1위인 무당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대통령이 무당에게 결재를 받아 온 이 해괴망측한 사건은 문명화된 21세기가 아니라 기원전 21세기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박근혜-최순실의 관계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최씨의 아버지 최태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둘의 사이가 가까워진 데에는 “양친을 흉탄에 잃은” 박정희 정권 시절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게 중론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21세기 무당통치’는 산업화로 칭송받는 개발독재의 어두운 그림자가 40년 뒤의 민주공화국을 사후적으로 멋지게 복수한 셈이다. 독재자의 딸이 대선에 출마했다고 우리를 조롱하던 외신들은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을까.

‘무당통치’를 박 대통령 스스로 인정한 10월 25일 이후, 대한민국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었다. 헌정은 이미 4년 전부터 중단된 상태였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하다. 하야와 탄핵이 각종 포털사이트 검색순위를 휩쓸 때, 지금은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후 혼란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 역풍은 계산해 넣었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지금은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혼란이고 국가안보에 가장 큰 위협이다. 박 대통령이 그 직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철저한 진상조사도 어렵다. 따라서 진상조사과정 자체가 하야든 탄핵이든 박 대통령의 직무정지 및 권력해체 과정과 궤를 같이해야 한다. 당연히 역풍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옳은 길을 갈 때의 역풍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나라 꼴이 이 지경까지 되었으면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혼란은 피할 수 없다. 혼란스럽고 복잡하니까 그냥 쉽게 쉽게 가자고 하면 언젠가 제2의 무당통치가 반드시 재림한다. 사회혼란이 무섭다고 민주주의를 미루거나 불의를 심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하의 군사독재가 가장 기뻐할, 민주공화국에 대한 가장 성공적인 사후복수가 될 것이다. 문명은 야만의 종식에서 시작된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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