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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밤의 종묘

입력
2017.05.1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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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오묘한 시간이다. 낮에 뻔하던 것들도 적당한 빛을 주면 이내 다른 공간으로 변한다. 일상적이고 이성적 공간이 감성적이고 낭만적으로 변한다. 과도한 빛으로 불쾌해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밤과 건축은 재미난 관계다. 낮의 에펠탑과 밤의 에펠탑은 냉정과 열정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 같지 않은가.

프랑스 유학시절 살았던 리옹이라는 도시는 고대부터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까지 시대별로 유적이 많았다. 집 근처 쏜 강(청계천 정도의 넓이)을 건너면 시간여행을 하듯이 훌쩍 과거가 펼쳐졌다. 문화유산과 관련한 행사들이 자주 열린 덕에 재미있는 경험도 많이 했다. 푸르비에르 언덕 위에 있던 고대로마의 원형극장에 대한 기억은 강렬했다. 책으로만 보던 원형극장을 처음 대면했을 때 신기한 감정으로 둘러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밤의 어둠이 내린 원형극장에서 무용 공연을 보았던 그날의 기억은 뜨겁고 생생한 감각으로 남아있다. 실비 기옘이라는 무용가의 공연이었다. 부채꼴 모양의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 숨죽이며 바라보았던 무대위의 무용수, 거대한 폐허의 실루엣. 실비 기옘을 새로 알았고, 밤의 매력을 알았으며, 원형극장의 마법같은 기운을 느꼈다. 죽은 유적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얼마전, 종묘를 찾았다. 저녁 8시에 열리는 종묘제례악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높은 담 안은 바깥보다 한층 어둡고 풀벌레 소리 외엔 흔한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어둑한 길에 맑은 바람이 불었다. 가로등이 있을 리 만무한 이곳, 바닥을 은은하게 비추는 지시등을 따라 말없이 조심스럽게 걸었다. 경건해지는 기분이었다.

종묘에 오니 오래전 기억이 훌쩍 떠올랐다. 대학 1학년 때, 좋아하는 건축물 앞에 앉아 몇 시간이나 스케치를 했다. 또래들처럼 나도 현대적인 건축물에 매료되어 그것들의 세련됨에 경의를 표하곤 했었다. 한창 전통건축 담론이 뜨겁던 시절이었지만 내 관심사는 그쪽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연히 들렀던 종묘는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수평으로 줄지어선 기둥들과 길고 거대한 지붕은 단순하면서도 세련되게 다가왔다. 웅장하지만 사람을 압도하지 않았고, 넓지만 비어있지 않았다. 내가 아는 전통건축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또 다른 기억은 종묘제례악을 감상했던 일이다. 해마다 치러지는 행사에 전주이씨 친구를 따라 얼떨결에 갔던 것이다. 기본 지식도 없이 뙤약볕에 앉아 긴 행사를 참관하자니 좀이 쑤셨다. 엄청 길고 지루해. 그게 종묘제례악에 대한 내 첫 감상이었다. 그 종묘제례악을 보겠다고 예약까지 하면서 다시 왔다. 그냥 밤의 종묘를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행사 시작 전, 어둠 속에 물들어있던 종묘 정전은 담담했다. 갑자기 열아홉 칸의 태실을 받치고 있던 붉은 기둥마다 조명이 켜졌다. 수평의 공간을 덮고 있는 넓은 지붕의 웅장한 자태가 은은하게 드러나자 사람들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비어있던 공간에 제관이 입장하고 악공들과 무용수들이 차례대로 등장 했다. 그리고 한 시간 남짓 공연이 이어졌다. 낯설고 어렵던 궁중음악과 무용이 이렇게 아름답게 다가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루해서 줄행랑쳤던 옛 기억에 미안해서 좀 더 마음을 다잡은 까닭일까. 아니면 밤이라서였을까. 공간을 새롭게 보도록 해주는 밤의 마법 말이다.

오래된 사찰부터 근대시기의 건축물까지 어디를 가든 건축유산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댄다. 그러나 낮의 공간만 봤다면 건축물의 매력을 절반만 본 것인지도 모른다. 밤의 공간은 더욱 유혹적일 테니까. 반갑게도 5월에는 ‘성북동야행’ ‘정동야행’처럼 밤에 건축유산을 둘러볼 수 있는 행사가 곳곳에서 열린다. 건축유산을 색다르게 경험하는 좋은 기회다. 봄밤의 건축 산책을 권한다.

정구원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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