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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상속에 관하여

입력
2018.08.03 18:2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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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 사람들에게 신분의 차등을 둔다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만인의 평등이 당연한 오늘날이라면 이런 질문이 우스꽝스러울 뿐이지만, 그리 오래지 않은 지난날에는 신분제의 필요성을 의심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의 자손은 높은 지위를 상속받고 미천한 지위를 가진 사람의 자손은 미천한 지위를 상속받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리고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널리 강조되는 중요한 의무이자 미덕이기도 했다.

한국은 불과 124년 전만 해도 상속 신분제가 있었는데, 여러 신분 가운데서도 두드러지게 노비가 많았다. 노비가 조선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긴 적도 있었으니 세계적으로도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우리 돈 천 원짜리에 찍혀 있는 학자는 수백 명의 노비를 거느렸고 국가의 근본을 바로 하기 위해 신분 차별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목민관의 마음가짐을 설파하고 재산을 공유하는 세상을 제시했던 실학자조차도 사회 혼란을 우려해 노비제 존속을 주장했다.

옛날의 주장들이 지금 관점에서 터무니없긴 하지만 가장 많이 배운 학자들조차 그랬으니, 보통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개인의 지위와 가치가 정해지는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였을 법 하다.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신분의 차등에 어떤 이점이 있었는가 하면 나는 그 제도는 아무런 필요가 없었으며 오히려 조선 사회가 답보 상태에 머물렀던 이유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이는 봉건적 신분질서를 더 빨리 혁파한 나라들이 더 빨리 근대 산업사회로 나아간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신분이 상속되는 사회에서는 도박이나 다름없는 방식으로 국가 지도자를 뽑는다. 태어날 때부터 다음 번 임금으로 정해진 사람이 미쳤거나 무능하더라도 어찌하지 못한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그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정초부는 그 시대 어느 양반들보다도 복잡한 세련미를 지닌 시를 지을 수 있었지만 죽을 때까지 나무 베는 노비로 살았다. 이는 그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손실이기도 했다.

세계 모든 문명이 신분 격차를 줄여 나가는 길로 진화해 온 까닭은 억압받는 타인들에 대한 동정심 때문만이 아니었다. 타고난 자격이 아닌 각자의 재량에 따라 삶을 살게끔 하자 모두에게 훨씬 큰 풍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맡은 역할의 상하관계는 있으므로 신분 자체가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 핏줄에 따른 신분의 상속이 사라졌을 뿐인데,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개인의 탁월함을 밀어붙일 수 있고 각자 삶의 목적을 좇음으로써 사회에 기여할 수 있게 됐다. 운이 좋다면 말이다.

운이 좋다는 것은 큰 사고를 당하지 않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 등도 포함되지만, 어떤 의미로는 태어날 때부터의 부유함을 뜻하기도 한다. 많은 재산을 물려받는 사람은 더 나은 교육의 기회와 의료 혜택을 제공받을 수 있고 추구할 수 있는 삶의 선택의 폭도 훨씬 넓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음의 질문을 조금 바꾸어서, 사람들에게 재산의 차등을 둔다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사회를 통으로 보는 관점으로 보았을 때 말이다.

나는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어려우므로 어떤 미래를 상상해 본다. 재산의 상속이 사라진 미래다. 모든 사람이 사회의 공동 부조를 받아 곤궁하지 않은 삶을 산다. 부모의 재산으로 타인을 강압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사회적 불만이 크게 줄어든다. 빚을 물려받는 사람도 없으므로 누구든 자기 적성과 관심사를 추구할 기회를 가질 수 있고, 그것이 모두의 번영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 미래에도 노력 여하에 따라 많은 재산을 쌓는 사람은 있으며 사유재산을 자기 의지로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가 신분 상속을 괴상하게 생각하듯이, 아마도 그 미래에는 핏줄에 따라 재산을 상속하던 과거를 얼토당토않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손이상 문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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